마크 곤잘레스 [966535]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1-12-06 01:4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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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처음 만났을 때, 나는 연대생이었고 그녀는 여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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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기억하시는 분 있으신가요? 오랫만에 다시 봐도 여전히ㅜㅜ 한번 읽어보세요 추천합니당!! 



프롤로그



내가 그때 지갑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PC방을 갔었더라면, 그녀를 평생 보지 못 했을 것이다.




#1. 첫 만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날씨가 매우 더웠다. 아마도 2006년 6~7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4시쯤일까. 수업을 마치고 연희관을 나와서 동주시비 쪽으로 걸어가는데 반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야 오늘 혁주 생일이다 ㅋㅋ 6시까지 대학약국 앞으로 와!]


6시라... 아직 2시간이나 남아있다. 어디서 시간 죽이고 있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나는 잠시 고민한다.


'그냥 애들 불러서 PC방에 잠깐 가있어야겠다. 잠깐... 이런!'


나는 그제야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릴없이 창서초 근처에 있는 하숙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늘 지나가던 길이다. 동주시비를 지나면 백양관이 나오고, 백양관을 지나면 중도가 나온다. 그렇게


쭉 걸어가다 보면 별다른 특징 없는 교문이 나올 테지. 교문 옆에는 늘 그렇듯 중국식 호떡을 팔고


있을 테고...


내 앞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재잘대며 걷고 있지


만 나는 무관심하고 심드렁할 뿐이다.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이 무료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권 총학에서 걸어놓은 플래카드를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따라


교문을 나서고, 사람들을 따라 교문 앞 횡단보도를 지난다. 


대학약국 사이 골목으로 들어간다. 페스티벌 노래방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내 하숙집을 찾아


걸어가는 그 길은 그다지 운치 있지 못하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똑같은 포즈로 똑같은 색깔과 모양


을 하고 있는 하숙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문을 열 때만 해도, 나는 식상함 그 자체였다.


'앗 깜짝이야!'


늘 똑같이 반복되던 일상이었지만, 그때 그 장면만은 정말 의외였다. 신선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앞에서 어떤 예쁘장한 여고생이 열심히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다. 나는 깜짝 놀랐고 그 여고


생도 깜짝 놀라는 눈치다. 어느새 놀라움은 사라졌지만, 그 빈자리를 민망함과 어색함이라는 녀석이


채운다.


'저... 여기 아저씨 집이에요?'


헉....! 아저씨라니.. 나는 재수하긴 했지만 06학번 신입생이라는 말이다! 하기야 나이 들어 보인다는


소리도 그다지 새로운 소리는 아니로군.


'내 집은 아니고, 하숙하는 집인데... 여기서 뭐 해?'


'아..! 그럼 여기서 담배 하나만 피우고 가도 상관없죠? 하나만 피우고 갈게요.'


여자가 담배라니.... 나는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걸 진짜로 싫어했다. 게다가 고등학생. 내 시선이 그다지


고울 리가 없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 여학생의 행동이 뭔가 어설프다는 걸 발견한다.


'아씨.... 왜 불이 안 붙지, 불량품인가?'


입에다 담배를 물고 연신 라이터 불을 붙이고 있지만 담배에 불이 붙지를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담배 필터 부분을 깊게 빨아줘야 불이 붙는데 저 여고생은 입에 물기만 한 채로 불을 붙이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이 웃겨서 큭하고 웃고 만다. 그러고 보니 별로 노는 애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담배 피우는 거 처음 봐요? 왜 웃어요? 기분 나쁘게'


'아 귀엽다. 너 담배 처음 피우지? 고등학생인 거 같은데? 어린애가 웬 담배야. 남의 하숙집 앞에서'


아마도 '어린애'라는 말에 그 여학생은 발끈한다.


'담배 원래 피우고, 나이 들 만큼 들었거든요? 아저씨 그냥 빨리 지나가시면 안 돼요?'


나는 왠지 이 상황이 재미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여학생한테서 던힐 라이트 한 갑과 라이터를 뺐는다.


여학생이랑 어울리지 않게 생각보다 중후해 보이고 비싸 보이는 라이터다. 나는 재수할 때 담배 피우던


기억을 살려서 담배를 하나 빼물고 불을 붙였다.


'불량품이기는, 담배는 이렇게 피우는 거야? 오케이? 그리고 고등학생의 왜 담배를 피워? 당당하게


피우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몰래 남의 하숙집 앞에서.. 이건 그냥 내가 압수할게.'


나는 담배를 끄고 유유히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여학생이 화가 난 표정으로 뒤따라온다.


'뭐야! 아저씨 지금 장난해요? 빨리 줘요 그거!'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하숙집 문을 닫고 들어갔다. 창문으로 바라보니 여학생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하숙집 앞을 서성거리다가 그냥 단념하고 돌아간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 붙잡고 내 라이터랑 담배를 


어떤 아저씨가 뺐어갔으니 찾아달라고 말하기는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담배랑 라이터를 서랍에다 대충 넣어두고 지갑부터 챙긴다. 여섯시가 되려면 아직 1시간도 넘게


남았다.


#2. 소주와 기억



혁주의 생일파티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느새 3차까지 간 우리는 더블 더블로 자리를 옮겼


다. 나는 그렇게 남들과 잘 융화되고 어울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분위기에 완전히 녹아들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반 친구들은 친근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주 오래된 친구들처럼, 그 술집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여러 학생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들도 반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겠지, 저들은 언제나 함께


저렇게 몇 년이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한참 동안 술자리 게임을 하다가 지겨웠는지 지현이가 나를 가리키며 한마디 한다.


'야 우리 진실게임하자. 성민 오빠부터 돌아가면서 하기! 물리면 소주 3잔 원샷!'


얘가 완전히 취했구나. 왜 하필 나부터 시작이니. 응?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진실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고등학교 때 사귀던 아이와 진실된 사


랑을 해보고 싶기는 했지. 그런데 그건 오직 나만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재수를 하


는 시점부터 그 아이는 더 이상 나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실연당했다. 아


마도 내가 학원에 틀어박혀서 재수를 하고 있는 1년이라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너무 길었던 시간 이었


으리라.


외롭고 힘든 시간을 그녀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빠! 빨리 시작하라니깐? 자 우리 반에서 누가 가장 마음에 들어?'


누가 마음에 드냐고? 솔직히 몇 명 예쁜 애들한테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지. 그런데 내가 곧바로 들이대


거나 고백할 여유는 없거든. 그게 진실된 감정인 지도 모르겠고, 난 한번 차인 이후로 진실된 사랑 같은 


거는 믿지 않는단 말이다.


나는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희진 선배. 누나 같고, 후배들 잘 챙겨주고, 성격도 좋잖아?'


주변에서 '오~~'하는 소리와 함께 사귀라고 아우성이다. 부담 없는 상대로 희진 누나가 가장 적절한 거


같아서 선택한 거지만, 그래도 누나는 괜찮은 여자다. 여자로서 끌리는 건 아니지만, 정말 호감이 간다.


나는 또 그런 식으로 진실게임을 피해 갔다. 나 말고도 다른 친구들도 똑같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 명씩


말한다. 아까의 환호성이 똑같이 반복된다. '와~사귀어라. 사귀어라~!'


'야 그러고 보니. 너 소개팅한 거는 어떻게 됐냐?'


내 앞에 있던 경석이 형이 묻는다. 내가 소주를 한잔 따라주려고 하니 됐다는 제스처를 보낸다. 약간 취


해 있어서 그런지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아 그냥.. 잘 모르겠어요. 저도 감정을 잘 모르겠고 상대방도 저를 그다지 좋아하는 거 같지 않고..'


소개팅은 왠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뭔가 잘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가서 연기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어떻게 저 여자애한테 다가가야 하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려줘 야 할까? 한 두 번 만나서 마음에


든다는 건 또 뭐고. 그냥 확 끌린다는 거? 하드웨어가 마음에 든다는 거야?


시간은 벌써 새벽 2시에 가까워졌다. 우선 여자애들을 집에다 보내주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남자들만 


서너 명 남는다.


'성민아 오늘 너네 집 신세 좀 지자. 우리 아버지한테 술 취해서 들어가다가 또 걸리면 난 죽음이야.'


신촌 한복판에 있는 내 하숙집은 완전히 여관이나 다름없다. 그다지 까칠한 성격이 아닌 내가 그걸


거절 할리는 없다. 게다가 아버지한테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덕택에 어머니 혼자서 외동아들인 나를 키우느라고 정말 고생하셨다. 아버지는 어떤 느낌일까. 차라리


아버지한테 죽도록 혼나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느새 나를 포함해 3명의 남자들이 내 하숙집으로 들어왔다. 경석이 형이 호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난


감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아, 술집에다 담배랑 라이터 놓고 왔다. 야 너 담배 안 피우지? 담배 없냐?'


그때 오늘 있었던 한편의 신선한 충격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한 여고생한테서


담배랑 라이터를 빼앗아버린 꼴이 되었네. 완전히 나쁜 놈 된 거잖아 이거?


'형 저기 서랍에 담배랑 라이터 있어요. 던힐 라이트 괜찮죠?'


'땡큐지 그럼'


경석이 형은 서랍을 열고 담배랑 라이터를 집어 든다.


'이야, 이거 라이터 되게 좋은 거 같은데. 이거 어디서 낫냐? 담배도 안 피우는 녀석이'


'그럴 일이 있었어요.'


나는 아까 생각이 나서 씩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경석이 형은 담배랑 라이터를 들고 현관 밖으로 


나간다. 아마 한두 대 정도 피우고 들어올 모양이다.


아까 낮에 봤던 여고생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꽤나 예뻤던 거 같은데, 왜 하필 여기서


담배를 피우려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 여고생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게 될지 따위는 잘 알지 못 했다. 어느새 여고생은 


머릿속에서 밀려나고 나는 곯아떨어진다. 내일 채플은 못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다.


어린 내가 아버지와 놀고 있는 꿈을 꾸고 있다. 수채화 같은 푸른 언덕에서다.


#3. 인연이란 거 안 믿어


내가 왜 밤 10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이 정확지 못하다. 아마도 근처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다가 되돌아오는 길이었으리라, 늦게 일어나서 채플도 들어가지 못 했을뿐더러 연이틀이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상당히 피곤했다. 게다가 내일 9시에 첫 수업,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여명 808을 하나 집어 든다. 이걸 마시면 다음날 숙취가 덜한 느낌이어서 종종 구입하곤 했다. 새로 일하


기 시작한듯한 생긋 웃는 인상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다. 다소 인위적인 친절함으로 바코드를 찍으면


서 말한다.


'5000원입니다.'


나는 천 원 지폐 4장에 500원 동전 2개를 건네주고 편의점을 나선다.


'안녕히 가세요'


마찬가지로 다소 인위적인 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하숙집으로 걸어갔다. 빨리 샤워하고 자고 싶은 생각


뿐이다. 별생각 없이 대문을 연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놀라고 만다. 누군가 있다.


나는 정말 당황했다. 밤 10시도 훌쩍 넘은 시간에 얘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도 더 당황스러워


운건 저 여학생의 모습이다. 파묻은 고개를 들자,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난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 눈물에 붙어있다. 한참을 거기서 울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를 발견하자 원망의 눈길이


가득해진다.


'야. 너... 여기서 뭐하고 있어? 지금이 몇 신데...'


'빨리 내놔요. 그거! 빨리요!'


여고생은 다시 눈물을 터뜨리면서 나를 몰아세운다. 펑펑 운다는 표현이 더 맞을듯싶다. 나는 더욱 당


황한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내가 왜 여고생 한 명을 이렇게까지 울리고 있는 거지?


'야.... 너 왜 이래? 응..?'


'빨리 달라고요. 라이터 빨리 줘요!'


저 여고생의 펑펑 우는 얼굴과 아까 편의점에서 본 아르바이트생의 생긋 웃는 얼굴이 오버랩된다.


이거 참, 극과 극의 조합이로군.


나는 우선 그 여고생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1층에 있는 한 하숙생이 갑작스러운 여자의


울음소리에 놀라서 현관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쳐다본다. 이거.. 완전 동네 망신이네.


'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울면 어떡해? 줄게, 줄 테니까 좀 울지 좀 말아봐.'


내가 다독이듯이 말하자 그제야 여고생은 좀 수그러든 듯했다. 나는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자초지종


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안 좋은 일 있어서.... 담배 한 개만 피워보려고 아빠 서랍에서 몰래 가져온 거란 말이에요. 근데 아저씨


가 다 가져가 버렸잖아요. 라이터 결혼할 때 아빠가 엄마한테 받은 정말 중요한 물건이란 말이에요.


괜히 내가 몰래 가져간 거 걸리기나 하고, 라이터도 뺏기고 씨발....흑흑'


아... 거참 '씨발'이란 말은 안 붙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렇게 안 생긴 애가 말버릇 정말 안 좋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게 누가 아빠 꺼 훔쳐다가 담배 피우라니? 응?


'야 그럼, 어제 내가 가져갈 때 바로 얘기를 하지.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아저씨가 뒤도 안 돌아보고 홱 들어갔거든요? 그리고 저 6시에 학교 마치자마자 바로 와서 기다렸거든


요? 시간 없어요. 빨리 라이터나 주시죠?'


진짜 까칠하네. 헉. 그러고 보니 4시간이나 여기서 죽치고 기다렸던 거야? 좀 일찍 들어갈 걸 그랬나.


'알았어. 나 따라와. 내 방에 있으니까 줄게.'


그런데 그 여학생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제야 나는 깨닫는다. 아무리 만인이 드나드는 성민 여관이라


고 해도, 내가 너무 개념이 없었군.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 집에 여고생이 따라 들어가기는 무리지.


'아니, 그냥 내가 가지고 오는 편이 빠르겠다. 10초만 기다려.'


나는 내방으로 뛰어가서 서랍을 열었다. 앗. 그런데 라이터랑 담배가 없다. 아! 경석이 형! 어제 일이 떠


오른다. 형이 어제 우리 집에서 그 라이터를 빌려서 담배를 피우고 무의식중에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음


에 틀림없다. 이런.. 난감하네. 저 까칠한 여고생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쟤 또 울고불고 난리치는 거 아


니야? 아씨.. 우선 입부터 틀어막아 버릴까?


나는 면목없다는 표정으로 그 여학생이 있는 곳으로 다시 와서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일


그 형한테서 라이터를 받아서 줄 테니 걱정 말고 좀 돌아가 줄래? 대충 이런 식이었다.


다행히 다시 울고불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내 손을 유심히 쳐다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손에


그때까지 들려져 있던 여명 808이다.


'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짜증 나... 아저씨. 나 지금 목마르고 짜증 나서 죽을 거 같거든요?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라이터 주세요. 네?'


그러더니 내 손에 있던 여명 808 캔을 홱 가져가더니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캔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마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릴뻔했다.


'캑캑.... 아 씨. 진짜. 이거 뭐야! 무슨 맛이 이래!?'


그럼... 그게 캔커피라도 되는 줄 알았니?


'아니 요즘에는 한약도 팔아요? 왜 이딴 걸 돈 주고 사서 마셔요? 아 짜증 나.'


이제 별거 가지고 다 시비구나. 숙취해소용 음료라는 걸 설명할 기력도 없다. 이게 5000원이나 한다는


걸 알면 기절을 하겠군.


'자요. 아저씨나 마셔요. 저 갈 테니까 폰 번호 불러요.'


안 마셔. 네 입에 들어갔다가 뿜어져 나온 거 다 봤거든.


나는 폰 번호를 알려준다. 여고생은 내 폰에 전화를 걸고 나서 인사도 없이 되돌아 나간다.


'야 잠깐만, 목마르다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내가 음료수 하나 사줄게 들고 가.'


'됐어요. 무슨 점 봐요? 인연 같은 거 안 믿거든요?'


휙 하고 지나가는 여고생을 바라보며 나는 정말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인연을 안 믿는다고? 그래, 나는 진정한 사랑을 안 믿으니까 이거 완전 최상의 조합이로군.


내일 언제 또 라이터를 돌려주지... 귀찮게 됐네.


나는 여명 캔을 분리수거 통에다 버리고 들어간다. 휴대폰에는 익숙하지 않은 번호 하나가 찍혀 있다.


나는 주저 없이 '진상녀'라고 번호를 등록한다.


#4. 회상, 2008년 9월 17일, 서울


내가 우리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몰래 훔쳐봤었더라면, 시간을 되돌려 하숙집 앞에서 너의 라이터


와 담배를 빼앗을 수 있었을까? 너는 그렇게 내 집 앞에서 4시간 동안 기다리며 나를 원망하고 몰아세


울 수 있었을까?


2006년 여름 즈음에 우연히 만났던 나와 너의 이야기는, 단지 쓸쓸한 기억으로 잊히고 말 것인지.


#5. 비와 그녀


강의실 밖에는 비가 아주 조금씩,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오전만 해도 밝았던 교정이 우울하다 싶을 만


큼 구름에 둘러싸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우산을 챙겨온 터라, 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내가 비 내리는 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우울한 날씨에 고등학교 때 사귀던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다. 특히나 이렇게 비 오는 날


씨에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미안해... 성민아. 그런데 나 자신이 없어. 내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릴 수 있을지, 다시 공부해야 하


는 너한테 짐이 되지는 않을지. 우리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나는 그러고 싶어.'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냐? 수많은 여자애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유명한 여대잖


아. 너도 이제 신입생인데 남들처럼 미팅도 하고 대학생들한테 고백도 받고 그런 특권쯤은 있어야 겠


지. 나는 너를 못 붙잡아. 그러니까 선택은 네가 했어야 했어. 왜 울어? 네가 울 이유는 없잖아. 차라리


내가 제발 떠나지 말라고 무릎 꿇고 울면 모를까.


갑자기 민망하다 싶을 만큼 엄청난 휴대폰 진동이 귓가를 때린다. 책상 위에 폰을 그냥 올려놨던 내 잘


못이다. 


교수님은 짐짓 모르는 척 수업을 계속 진행하고 몇몇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나는 서


둘러 무음모드로 바꿔놓은 다음 문자를 확인한다.


[저 지금 학교 끝나고 아저씨네 집 앞으로 가고 있는 중이에욤. 한 20분 뒤쯤 도착할 듯.]


너도 참... 분위기 깨는 데는 선수구나. 왜 얘만 등장하면 늘 똑같던, 늘 그랬던 분위기가 한 번에 뒤집히


지?


[응. 나도 그때쯤에 수업 끝나서 바로 갈 거야. 없어도 잠깐만 기다려]


딴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교수님이 수업을 마무리 짓고 있다. 종합관 건물 밖으로 나가니 아까 보


다 빗줄기가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반 친구들 몇 녀석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성민아, 위닝하러 가자'


'야, 오늘은 안되겠다. 누구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오~누구? 여자냐? 여자?'


그러고 보니, 성별로 따지면 여자는 여자로군. 여자 만나러 가는 게 맞기는 맞네.


친구들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데, 문자가 한통 더 도착한다. 여고생으로 부터다.


[지금 맥도날드 앞에 있는 지하철 출군데요.... 비 와서 못 나가고 있어요ㅠ 이쪽으로 좀 와주면 안 돼요?]


우산 안 가져왔니? 준비성 하고는... 귀찮긴 하지만 안될 건 없지. 나는 간단하게 답 문화고 3번 출구 쪽의


로 걸어간다.


비가 내리지만, 3번 출구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다들 만나면 행복한 연인을 기다리고,


친구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뭐지? '내가 빼앗아간 라이터 받으려고 기다리는 애'를 만나러 가는 거


구나. 진짜 이건 정말이지 별로다.


그 여학생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조용히 서있는 그 애한테 다


나가서 어깨에 살짝 손을 댄다.


'어. 안녕하세요. 우산을 안 가져와서요. 미안요.'


미안하다고? 나는 왜 비 오는 날에 여자들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밖에 못 들을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네


가 미안할 건 또 뭐냐? 내가 라이터 가져가서 네가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고 몇 번이나 신촌으로 와야


했던 건데.


다시 보니 어제 흥분했던 모습에 비하니까 많이 차분해진 모습이다. 그래, 차분해지니까 좀 낫네.


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제처럼 까칠하게 대들었다면 내가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야, 너 저녁 먹었어? 내가 미안한 것도 있고... 밥 사줄게, 먹고 가.'


여고생은 의외의 제안이었던 듯,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기로 했었는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야 오늘 너희들끼리 그냥 먹어. 나 공짜로 먹는다 밥. 응? 아 그냥 아는 오빠랑'


그러면 그렇지 네 핵심은 바로 '공짜밥' 이었구나. 이거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된장 포스 좀 풍기겠는데?


아는 오빠라... 그래 어떤 의미에서 '아는' 오빠인 건 맞지. 내가 '여자' 만나러 가는 거처럼


나는 파스타 투웰브로 가려고 마음먹고 발걸음을 돌린다. 그때 뒤에서 여고생이 나를 부른다.


'나 우산 없다니깐요.'


아 참, 그렇지 같이 쓰고 가야겠네. 내가 먹자고 했으니, 우산도 씌워주는 게 맞지. 근데 뭔가 사모님


모시고 가는 최 기사가 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야 네가 약간만 앞으로 가. 내가 씌워줄게'


막상 같이 우산을 쓰고 가니까 분위기가 좀 어색하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화장도 거의 안 한 거 같은데


피부는 좋네. 키는 163정도? 근데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나이 먹어서 주책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파스타 투웰브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다. 여고생이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가 나한테 묻는다.


'뭐가 맛있어요? 해물 소스? 토마토소스?'


그냥 아무거나 시키지. 나는 화이트소스가 좀 느끼하기는 한데 한번 먹어보라면 주문해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까 정말 할 얘기가 없다. 이거 무슨 소개팅도 아닌데 왜 이렇게 뻘쭘한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너랑 나랑 공감대를 형성할만한 무언가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구나.


아! 이름.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네. 그런데 나는 방금 네 이름을 알았어. 네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에서.


'손시연'


내가 명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어색했는지, 여고생이 가슴 언저리를 툭툭 털며 나한테 물어


다. 


'뭐 묻었어요? 왜 계속 이쪽 쳐다봐요?'


잠깐만, 목소리 뉘앙스가 '이 변태야 왜 계속 가슴 쳐다봐!' 대충 이렇게 들린다? 나 변태 아니거든, 네


가슴 쳐다본 것도 아니고. 어린애 가슴 같은 거 관심 없거든?


'너 어디 고등학교야? 몇 학년?'


'S 고등학교 2학년이요. 아저씨는 대학생이에요? 어디? 연대? 서강대?'


'연세대, 나 신입생이야.'


'오~!연세대. 공부 잘했나 보네. 나 연세대 들어가면 아빠가 정말 좋아할 탠데.'


공부? 내가 경쟁상대로 생각한 애보다는 못했어. 모의고사랑 내신 10번 시험 보면 8~9번은 그 녀석이


점수가 더 높게 나왔거든. 그게 늘 스트레스였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 근데 그놈의 경쟁의식 때문에 늘 불만족스러웠어. 성적에 있어서는.


'그럼 아저씨는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다 1등급 받고 그랬겠네요? 반에서 1등도 하고? 나는 반에서 15


등안에 겨우 드는데.'


애는 애구나. 하기야 저 때 관심사가 다 그렇지 뭐. 너는 몇 등급이냐 전교 몇 등이냐 이런 거.


'근데 너 아까부터 왜 계속 아저씨 아저씨 거려 나 86년생이거든? 너 몇 년 생인데?'


'저 빠른 90이거든요? 와 86년생이래. 완전히 아저씨다 아저씨.'


헉, 90년생. 시간의 갭이 있기는 있다. 나는 올림픽 보면서 걸음마 뗐는데, 너는 그때 이 세상에 존재하


지도 않았구나. 어떻게 보면 아저씨가 맞기는 맞네. 근데 꼭 그렇게 불러야 돼? 완전 노친네 된 느낌이라


구. 그래도 생각보다 분위기 안 어색하고 괜찮아졌네.


분위기 안 어색해져서 좋기는 한데 너랑 나, 진짜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다. 이름도 달라, 성격도 달라,


나이도 달라, 성적도 달라, 이건 뭐 공유할게 진짜 없네.


맞다. 라이터 돌려 주기로 했지. 까먹을뻔했다.


'라이터 받아.'


'아! 깜빡할뻔했다. 바본가 봐 바보.'


나야 그렇다 치고, 얘는 왜 이래? 라이터 받으러 온 애가 그새 그걸 까먹니? 어제 그렇게 라이터 내놓으라


고 울고불고 난리 브루스를 추더니.


'근데 이거 되게 비싼 건가 보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어?'


그때 갑자기 여고생의 얼굴이 완전히 울상이 된다. 어? 얘 또 우는 거 아니야? 분위기 왜 이래?


'나.. 아빠랑 여동생이랑 셋이 살거든요. 엄마가 나 중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그거 엄마가 아빠한테 젊


었을 때 사준 거라, 아빠가 엄청 아끼는 거란 말이에요.'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미안 미안. 이런 반응을 바라고 말한 게 아닌데. 아 진짜 이런 거 너무 싫다. 나는 왜


누가 내 앞에서 울려고 하는 게 정말 싫지? 나까지 슬퍼지려고 해. 아무리 봐도 너 진짜 애는 애다. 어제


는 그렇게 까칠하더니만...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울상을 짓냐? 너 이런 이미지 아니잖아?


나는 빨리 대화의 화제를 바꾼다.


'되게 중요한 거였네. 내가 진짜 미안. 스파게티는 어때? 맛있어?'


'조금. 솔직히 약간 느끼한 거 같은데 먹을 만은 해요.'


나는 그때 다시 깨닫는다. 얘는 어머니가 없구나, 나는 아버지가 없는데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안 계시는


거. 이것도 공통분모라면 공통분모네. 너도 나와 같은 느낌의 슬픔 하나는 가슴속에 공유하고 있는 거


니까. 스파게티 다 먹을 즈음에 겨우 하나 찾았구나. 공통점.


'아저씨 이름 뭐예요? 내 이름은 아까 명찰로 봤죠?


응. 손시연이잖아. 너 아까 내가 명찰 보고 있는 건지 알았구나? 나 혼자 괜히 변태로 몰린 것처럼 오버


한 거였네.


'나 최성민'


'휴대폰 이름 바꿔서 저장해야겠다. 이름 몰라서 '이상한 아저씨'로 저장해 놨는데.'


이.... 이상한 아저씨?! 이 자식이 사람을 가지고 노네. 근데 이거 어쩌나. 내 폰에 너는 '진상녀'


라고 등록돼 있는데? 이상한 아저씨와 진상녀와의 만남? 진짜 그림 안 나온다. 그치?


나 역시 이름을 바꿔 저장하려는데, 휴대폰이 없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방 속에다 넣어뒀다 보


다.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여고생이 뭔가 발견한 듯 말한다.


'어?! 유리알 유희네? 나 그거 읽고 독후감 써서 내라고 선생님이 그랬는데.'


너네도 이거 독후감 쓰니? 또 하나 공통점 있네. 나도 연대에서 이거 독후감 쓰라고 해서 썼었거든.


헤르만 헤세. 이름만 생각해도 너무 복잡하다 지금.


'그거 나 빌려줘요. 아싸 책값 벌었다.'


공짜 엄청 좋아하는 거 같아 너 밥 먹으러 따라온 목적부터가 그렇지? 이제 책까지 공짜로 빌려 가려고?


'이거 그냥 줄게. 너 가져.'


'오~쿨한 척. 빌려 갔다가 나중에 시간 남으면 돌려 줄게요. 고마워요. 땡큐.'


책을 책가방에 집어넣으면서 우리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다. 나 혼자 다니면 


그냥 우산 안 쓰고 다닐 텐데. 얘 때문에 안 쓸 수도 없고. 그냥 씌워주기로 한다. 조금 걷다 보니 벌써 3번


출구 앞이다.


'야, 너 지하철역에서 집 가까워? 많이 걸어가야 돼?'


'성수에서 내려서 한 15분쯤? 왜요?'


'그럼 너 이거 가져가서 쓰고 가. 3천 원 주고 산 거니까 그냥 가져. 난 여기서 5분이면 가니까.'


'안 그래도 되는데. 괜찮은데..'


나는 우산을 그 여고생 손에 쥐여주고 지하철로 보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남자의 이런 호의에는 별


로 익숙치 않은 거 같다.


'그럼 갈게요. 잘 가요.'


이번에는 인사도 없이 휙 지나가지는 않는군. 나는 아주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하숙집으로 걸어간


다. 비 오는 날이 꼭 짜증 나고 우울하지만은 않구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6. 같은 생각


'이제 답안 작성 다하신 분들은 조용히 나가셔도 됩니다.'


조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몇몇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간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가방을 챙겼다. 한번 더 검토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서 빨리 시험에서 해방되고 싶은 생각이


나를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시험이 끝났으니. 이제 방학이다. 몸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다. 상쾌하게 땀을 흘리고 싶다. 나는 곧바로


이글 피트니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그 여고생의 만남은 그때 3번 출구 앞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라이터라는 매개물이 우


리를 이어주었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이어줄 매개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손시연이 빌려 간 유리알 유희


라는 책을 통해서 다시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만남의 가능성마저도 일주일 전


그 애가 보낸 문자 한 통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윽.. 미안해요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유리알 유희 잃어버렸어요. 어떡하죠?]


당시 뭐라고 다문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기말고사와 여러 가지 과제에 밤새 시달리는


라 여고생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 책 너한테 준거니까 괜찮아. 나 지금 뭐 하는 중


이냐고? 응 시험기간이라 완전히 쩔어있어. 너희도 곧 기말 고사지? 아마도 이런 식의 성의 없는 답문을


하다가 그만두었겠지,


시간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억 속에서 손시연이라는 여고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아져만 갔다. 갑자기 신선하게 다가왔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신기루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애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여고생이 나한테 가져다준 인상이나 느낌


은 강렬했다. 하지만 그 느낌이라는 것이 반드시 가슴 뛰는 애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나는 손시연을


생각했었지만, 사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 이것이 만들어낸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나는 한 명의 평범한 대학생


으로, 그 애는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는 위치로 되돌아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삶의


테두리를 바꿔놓을 새로운 해프닝은 아마도 발생하기 힘들겠지, 인생은 영화가 아니니까.


한가지 확실한 건 있다. 적어도 나란 놈에게는 여고생과 나 사이의 울타리와 벽을 넘어설 용기가 없었


다.


헬스를 마치고 땀에 젖어 탈의실 문을 여는데,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어이 최성민! 잘 지내지? 이번에 연대 갔다며? 축하한다. 자식ㅋㅋ 이번 주 토요일에 강남에서 동창회


한다. 뭉치자!]


김창수, 오랜만이네. 그렇게 경쟁의식을 느꼈던 녀석인데 오래간만에 네 이름을 보니까 정말 반갑다. 친구


란 게 이런 건가 봐.


고3 때 네가 반장, 내가 부반장이었지. 너는 1등, 나는 만년 2등이었고. 넌 내가 480점을 맞든, 490점을


맞든 그보다 꼭 몇 점씩은 나보다 점수가 높았어. 운 좋게 내가 시험 점수가 높아도 나만 혼자 가슴 뛰어


을뿐, 너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고등학교 때 음악실에서 틀어준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슬프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나는 영화를 보


는 내내 살리에르를 마음속으로 응원했어. 충분히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서도 모차르트에 대한 콤플렉


스로 불운했던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었거든.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너보다 나은 게 한가지 있기는 했네


여자친구. 강소영 말이야 그건 너도 항상 부러워했었잖아.


나는 그제야 한 통의 문자가 더 와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갈뻔했다.


[시험 잘 봤어요~? 아저씨?]


의외로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쪽은 내가 아니라 손시연이었다. 시험 끝나


니까 이제 여유가 좀 생기는 거 같다. 미안, 나 완전히 이기적인 동물인가 봐. 


[오늘 끝났어. 넌 시험 잘 봤어?]


[왕짜증 ㅠ 시험 얘긴 그만 ㅎ 우리 학교 놀러 와요. 시험 끝난 기념으로 내가 쏠게요]


야, 문자 칼같이 오는 건 마음에 든다. 소개팅할 때 만난 여자애들이 일부러 답문 늦게 보낼 때마다 정


이 뚝뚝 떨어졌거든. 이런 식으로 밖에 자기 가치를 표현 못할까? 이런 생각 때문에 싫어졌어. 내가 너


무 꽉 막힌 걸까? 주위 여자애들은 나보고 연애 하수래.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되는데 어중간한 나쁜 남


자 콘셉트에, 여자 마음도 모를뿐더러 센스도 부족하다나? 근데 어떡하니. 싸이월드에 퍼가는 연애 지식


같은 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걸.


가만, 네가 쏜다고? 공짜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 내가 여고생한테 밥까지 얻어먹을 정도로


불쌍해 보이나 봐. 솔직히 지금 개운하기는 한데, 완전히 피곤해. 드러누워 자고 싶다고. 그래도 네가 사는


밥 한번 먹고 싶기는 하구나.


나는 연대 앞에서 S 고등학교 근처로 가는 버스를 탔다. 6시까지 오라고 했지? 근데 왜 이렇게 버스가


느리게 가느냐. 아무래도 또 늦을 거 같네.


[야 한 십분 늦을 거 같은데. 어디로 갈까?]


[교문 앞으로 오삼~!]


역시 고등학생. 하삼체 같은 거 나 별로거든? 아 너 보인다. 근데 왜 이렇게 손을 흔들어대? 완전히 뻘쭘해.


이렇게 고등학생 많은 거 처음 본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어이~! 연대 아저씨! 여기!'


제발 그런 하이톤으로 화물연대 노동자 아저씨 부르듯이 나 좀 부르지 마.


'아저씨'라는 말에 그 학교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깜짝 놀라며 손시연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당연


하지, 자기 학교 여학생이 삼촌도 아니고 오빠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아저씨'를 부르는데 너 같으면


안 놀라겠냐?


손시연의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나를 쳐다보고 킥킥 거리며 지나간다. 쪽팔린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어. 너 나 놀려먹으려고 이러는 거지 지금? 나 생각보다 소심한 놈이라고.


'와 되게 오랜만이다. 아저씨. 왜 도망쳐요? 나랑 있는 게 부끄러워요?'


정말 놀리는 말투다. 너네 홈그라운드라 이거지?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집 가서 잠이나 자는 건데.


'빨리 쏘기나 해.'


'알았어요. 따라와요.'


얘 뭐 기분 좋은 일 있었나? 완전 기분이 업 돼있네.


'어머. 시연아 뭐 해? 옆에 누구? 아..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내가 왜 네 친구들한테 고개 숙여서 경어체로 인사하고 있느냐고.


너랑 좀 떨어져서 걸어가야겠다. 앞서가 뒤따라 갈 테니까.


손시연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허름한 분식집이었다. 그래...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


기야,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 그냥 고맙게 먹을게.


'아저씨, 여기 라볶이 맛있어요. 그때 아저씨가 사준 거보다 훨씬.'


2500원짜리 하나 시켜주면서 생색은... 그래도 오늘 만남으로 파스타 투웰브랑, 분식집의 간극


만큼 우리 거리가 줄어든 거 같아. 그때 파스타 투웰브에서 마주 앉았을 때는 정말 어색했었는데, 지금은 


별로 안 어색해.


'와 아저씨 이제 보니까 진짜 진상이다. 완전 쩔었네. 연대생들은 다 공부 열심히 하나 봐요?'


헉, 밥 사주려면 좀 곱게 사주면 안 되느냐? 오랜만에 봐서 밥 먹는 상대방한테 진상이라는 소리를 꼭 해야


갰어? 그리고 진상은 내가 아니라 너거든? 옛날에 내 폰에 너 '진상녀'로 등록돼 있던 거 모르지?


내가 공짜로 사줄 때는 고분고분 잘 먹더니. 자기가 사준다고 아주 기고 만장하다.


'그래 나 진상이다. 됐지? 목소리 좀 낮추지?'


'미안, 장난이에요. 장난, 진짜 빨리 나왔다. 아저씨 맛있게 먹어요.'


저녁 대용으로 먹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럭저럭 맛은 있다. 사실, 라볶이 맛보다도 생각


보다 이 여고생과의 만남이 부담 없고 편해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나는 솔직히 떨어져 있으면서 너랑


나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는 아니었나 보네 부끄러워진다. 갑자기


나는 주변 환경을 핑계 대면서 너랑 나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있던 건지도 몰라


'야 근처에 배스킨라빈스 있어? 아이스크림은 내가 사줄게.'


'배스킨라빈스는 없고, 아파트 단지 쪽에 하겐다즈 있어요.'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하겐다즈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고, 우리 둘은 지하철역으로 걸어


갔다.


'어, 키 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크네 아저씨? 호빗까진 아니지만.'


자, 이제 진상에 이어서 호빗까지 나왔어. 너 오늘 대놓고 막 나가는 거 같아.


'야 나 그래도 177이거든? 너야말로 겨우 내 어깨 넘어오면서 무슨.'


'난 여자잖아요. 남자가 조인성 정도는 커야지. 정말 멋있잖아요. 조인성. 난 180은 넘는 남자랑 사귀어


야지. 대학 가면.'


그래 희망사항이라는데 누가 말리겠냐. 조인성 멋있지. 근데 나도 김태희 좋아하거든? 너 한번 김태희


랑 비교 당해볼래?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 가슴에 상처 줄까 봐 내가 참는다.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해진다. 나는 성수역 집 근처까지 손시연을 바래다줬다.


'야 오늘 잘 먹었다. 잘 들어가.'


'네. 다음번엔 아저씨가 사줘요. 저 갈게요.'


집으로 돌아오는 덜컹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계속 손시연이 생각났다. 소개팅을 여러 번 했지만, 이


렇게 재밌고 편하게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할까? 너무 편하고 기분이 좋다. 장


난으로 갈굼 당하는 것도 기분 나쁘지 않고, 약간 어설프게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좋다.


손시연,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7. 어느 날 사랑이


이상한 일이다. 왜 내 머릿속에서 그 여고생 생각이 자꾸 나는 거지? 이런 느낌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고등학교 때 강소영을 사귈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아니야. 소영이랑은 학교에서 매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잠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보고 싶다고나 그러지는 않았어. 그런데 나는 지금 너무


보고 싶다. 너를.


아침에 일어났는데 제일 먼저 너에 대한 느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머리 감으려고 눈을 감아도 마


찬 가지다. 토익학원에서도, 헬스장에서도, 하숙집에서 TV를 켰을 때도, 컴퓨터를 할 때도 잠깐씩 네 생


각이 나. 그런데 이게 어떤 감정인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 편한 친구 그 이상의 감정인 건 확실해.


하지만 이게 사랑인지는 확신이 안 서네. 고등학교 때는 강소영이랑 결혼하고 평생같이 살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 애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행복했지.


그렇지만 솔직히 너에 대한 감정이 불타는 사랑 뭐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그 자체로 편하고


보고 싶기는 한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무려 4살 차이인가? 아니 3살 차이지! 너는 빠른 90이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근데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왜 인터넷 검색창에다 '대학생 여고생' 을 검색하고 있는 거야? 저기 지식인에 누가 써놨네.


'대학생인데 여고생이랑 사귀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볼까요?ㅠㅠ'


저런 걸 물어볼 때가 없어서 지식인에다 물어보는 녀석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일까. 값싼 위안이


라도 받으려는 건가. 근데 나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놈이네. 여기서 이런 거나 검색하고 있고. 아직 사랑하


는 감정인지 조차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와. 정말 복잡하다.


친구들아! 자, 이리 와봐. 내 여자친구 소개해줄게. 여고생이야! 2학년. 예쁘지?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친구 놈들은 분명 놀라서 이렇게 말하겠지.


'이런 미친놈, 완전히 순진한 어린애 꼬드겨서 뭐 하는 짓이야!'


그만. 이런 복잡한 생각 그냥 집어치우자. 그냥 나 자신에게 내 감정에 충실하자. 그러고 보니 내가 먼


저 문자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네. 내가 늘 이런 식이니까 여자애들로부터 센스 없다는 소리 나 듣는 거겠지.


[뭐 하고 있어~?]


[수업 중이요~^^ 완전 선생님 몰래 문자 쓰고 있음. 왜요? 아저씨?]


아, 수업 중이구나. 센스란 게 이런 건데. 수업 중인 거 미리 알고 여자애 좀 배려해주면 좀 좋을까?.


[그냥 심심해서ㅋ 학교 끝나고 신촌 놀러 와. 이번엔 내가 쏠 차례잖아.]


[어. 오늘은 안되는데ㅜ 내일 놀러 갈게요 밥사줘요ㅋㅋ]


[그래~그럼 내일 내가 또 연락할게. 수업 집중해! ㅋ]


별것도 아닌데 허탈하다. 그냥 오늘 못 보고 내일 보는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아쉬울까. 다행히 얘도


나랑 만나는 게 어색하거나 부담되거나 하지는 않나 보다. 심심해도 할 수 없지 뭐. 그냥 집에서 빈둥 거


리기나 해야겠다.


밤 10시쯤 됐는데, 고등학교 때 정말 친했던 친구 민석이로부터 연락이 온다 맥주 사서 하숙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란다. 지금 서강대에 다니는데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다. 마침 심심했는


데 잘 됐다. 이 녀석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같은 과 후배 여자애에게 완전히 푹 빠져있었다,


'나 2주일 내로 걔한테 눈 딱 감고 질러버리려고. 아, 완전 내 스타일이야. 몸매 하며 얼굴 하며 아주... 죽


는다 죽어.'


'잘해봐 인마. 괜히 차이고 나서 나한테 술 사 달라고 하지 말고.'


맥주 마시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12시다. 갑자기 민석이가 내


컴퓨터 앞에 앉더니 이것저것 뒤져본다.


'오 치밀한데 이 자식? 야동 어디다 숨겨놨어? 빨리 자수하지?'


'나 재수하면서 야동 끊었거든? 이미 고등학교 졸업할 때 같이 졸업했으니까 헛수고하지 마.'


'그래? 그럼 내가 오랜만에 새로운 거 하나 소개해 주마.'


저 녀석 장난기는 진짜 알아줘야 돼. 어? 근데 너 지금 뭘 다운로드하는 거냐. 그래 말리기도 귀찮다.


'제발 너 혼자 곱게 감상하고 지워라. 응?'


민석이가 다운로드한 성인 동영상 제목을 본다. 여고생을 어쩌니 저쩌네 하는 원색적인 제목이 쓰여 있


다. 잠깐, 이건 아니잖아.


'잠깐 스톱!'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외치면서 민석이에게서 마우스를 낚아채 영상을 지워버렸다. 갑자기 혼자 열


받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반사적인 거부감이 든다. 하필 여고생이 들어가는 제목의 영


상이냐고 제발 그런 영상 좀 다운로드해 보지 마. 완전 기분 찜찜하다고.


'아씨, 이딴 거 좀 다운로드하지 말라고! 여고생이면 애들인데 좀 순수하게 바라보면 안 되냐? 응?'


완전 내 감정 이입시켜서 한풀이라도 하듯이 나는 민석이를 몰아세웠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


는지 민석이가 웃으며 응수한다.


'뭐야, 정말 웃기네. 네가 보고 지우라메.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해? 이 자식 이거.'


'아까 했던 말 취소. 다운로드하는 거 절대 금지다. 인마.'


나는 민석이를 반강제로 컴퓨터 앞에서 끌어내리고 좀 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1시쯤 되자


민석이도 그만 일어나려는지 맥주 캔이랑 아주 부스러기를 치운다.


'야 내일모레, 토요일 동창회 하는 거 알지? 너 재수하느라고 그동안 못 나왔었잖아. 너보고 싶다는 


애들 많더라. 이번에 꼭 나와.'


'응. 알았다. 잘 가라.'


나는 민석이를 보내고 하숙집 침대에 드러눕는다. 내 방 주변을 둘러본다. 내 하숙집이 왜 이렇게 산뜻


하게 느껴지지? 다시 그 애 얼굴이 떠오른다. 기분이 좋아진다. 상쾌하다.


나는 내일 손시연을 만난다.


'어? 너 왜 사복 입었어? 교복은 어쩌고?'


다시 만난 손시연은 사복 차림이었다. 교복을 안 입으니까 그래도 정말 어린 여고생처럼 보이지는 않는


다. 같이 돌아다닐 때 부담스럽니는 않겠네. 다시 만나니까 좋다.


'저라고 맨날 교복만 입는 줄 알아요? 평소에 사복 많이 입거든요?'


'너 학교 끝나고 바로 오는 거잖아?'


'아저씨 되게 궁금한 거 많네 정말. 그냥 사복 입고 왔으면 그러려니 하면 안 돼요? 오늘 뭐 사줄 거예요?'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뭐...'


'그럼 내가 가는 대로 따라와.'


여자애들이 유일하게 내 강점으로 뽑는 거. 여자랑 만날 때 잘 리드하고 끌고 다니고 하는 거지.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지. 먹고 싶은 거 먹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면 되는 거잖아? 이렇게 부담 없이 편


하고 좋은데.


롤집에서 롤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가, 영화 얘기가 나왔다. 그래, 영화 안 좋아하는 사람


은 별로 없지. 너도 좋아하는구나, 영화?


'야 그럼 이거 먹고 영화 보자, 요즘에 재밌는 거 하나?'


'저도 요즘에 뭐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학교만 다니다 보니까. 공포영화만 아니면 돼요. 저 무서운 거


절대로 못 봄.'


때마침 6월 말이라 공포영화 시즌일 텐데, 너 성격만 보면 공포 영화 무지 잘 볼 거 같은데 의외로


무서운 거 싫어하는구나. 나는 손시연을 데리고 아트레온으로 갔다. 요즘 무슨 영화하지? 와 근데 진짜


볼 거 없다. 게다가 너 공포영화 못 보니까 그것도 제외해야 되고 슈퍼맨 리턴즈 괜찮겠네. 헐, 근데 상


영시 간이 2시간 반을 넘어. 저것도 제외.


'오, 조인성 나오는 영화한다! 저거 봐요! 어.. 근데 18세 이상 관람이다....'


아 맞다.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18세 이상 관람가도 못 보네. 그럼 대체 뭘 봐야 되냐 우리?


'너 진짜 꼬꼬마다. 18세 이상도 못 보고, 공포영화도 못 보고. 너 10시 전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그럼 시간 안 맞는 거는 또 못 보네? 어디 만화영화하는데 없나?'


되돌아보면, 손시연은 어리다는 말에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 짜증나 진짜. 왜 아저씨는 말끝마다 어린애 아니면 꼬꼬마 걸려요? 나 사복 입어서 18세 영화 볼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그냥 비열한 거리 봐요.'


이러다가 얘 삐지겠다. 그래 장난 그만할게. 그래도 18세 이상은 안돼. 조인성 나와서 이러는 거 아니


니깐 오해는 말어. 결국 우리가 선택한 영화는 엑스맨이었다. 고등학생이랑 영화 보려니까 진짜 고려해


야 될 게 많다는 걸 느낀다.


'팝콘이랑 음료수는 내가 쏠게요. 러브 콤보 면 되겠다. 러브 콤보 괜찮죠? 러브 콤보 사 올게요.'


얘가 진짜... 왜 이렇게 '러브러브' 거려? 나 원래 영화 볼 때 뭐 안 먹는데. 그래도 괜찮다. 같이 영화 보니


까 재밌네. '여자' 랑 영화 보는 거도 오래간 만인 거 같아. 아, 아니다. 소개팅 한 여자애랑 얼마 전에 영화 


보기는 했었지. 근데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여자애한테 연락을 안 했어. 그러니까 얼마 뒤에 소개해 준


애 통해서 왜 연락 안 하느냐고 떠보듯이 물어보더라고. 간단했어. 너무 거리감 느껴지고 불편했거든.


솔직히 영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느새 영화가 끝나고 지하철로 걸어가는데 손시연이 말을


꺼냈다.


'아저씨 나 종로에 있는 단과학원 등록했어요. 주말에 다녀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서 완전 왕따처럼


주변에서 혼자 밥 먹어야 될 듯.'


'오. 공부 좀 열심히 하려나 본데?'


'당연하죠. 내가 수학이 좀 안되거든요. 수학만 잘하면 10등 정도 할 수 있는데 진짜. 수학 때문에 완전


미치겠어요. 요즘.'


'열심히 해. 수학은 시간 많이 투자하면 점수 올라. 학원 다니면 점수 많이 오를걸?'


지금만 해도 안 그러는데,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눈치가 없었을까? 그 애가 그 정도 말했으면 내가 알아서


주말에 학원 근처에서 밥 사준다거나, 밥 먹으면서 수학 가르쳐 준다거나 할 수 있어야 했다.


결국 다시 이야기를 꺼낸 건 손시연이었다.


'주말에 학원 근처에서 혼자 밥 먹기 진짜 싫다. 아저씨, 언제 근처에서 한번 더 밥 사주세요.'


'아. 알았어 학원 몇 시에 끝나는데?'


'토요일은 저녁 7시에 끝나고, 일요일은 1시에 끝나요.'


'나 토요일 고등학교 동창회라 술 많이 마실 거 같아서... 일요일은 힘들 거 같아 토요일 저녁에 사


줄게. 너 사주고 바로 동창회 가면 되겠다.'


나는 그렇게 한번 더 사주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앞의


로 너를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좋다. 행복하다.


사랑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8. 동창회


7시까지 학원 앞에서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늦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학원 앞으로 걸


어간다. 6시 50분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런데 왜 학원 끝나는 시간에 학생들이 하나도 안 보이


지? 학원 입구 앞에는 휴대폰 화면을 계속 확인하고 서있는 손시연과 어떤 여학생 둘뿐이다.


'많이 기다렸어? 빨리 오려고 지하철역부터 막 뛰어왔는데.'


다행히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는 듯, 밝은 얼굴이다.


'아뇨. 방금 끝나서 별로 안 기다렸어요. 아저씨, 이 근처 뭐 먹을 데 있는지 알아요?'


'나도 이 근처는 안 와봐서 잘 모르겠네. 아까 오다 보니까 음식점 몰려있던데 거기로 가보자.'


둘이 걸어갔던 그 길은 도로 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 했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곳곳에 물이 고여있고.


자동차도 많이 지나가고 있다. 야야, 앞 좀 보고 걸어 네 앞에 물 고여있는 거 안 보여?


'조심해. 조심'


나는 손시연이 고인 물을 피할 수 있게 어깨를 감싸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엄마야!'


너무 세게 끌어당겼나. 얘가 왜 이렇게 깜짝 놀라? 엄마까지 찾고. 괜히 나까지 놀랬잖아. 절대로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니거든?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너 신발이랑 양말까지 다 젖을뻔했어.


손시연이 놀랐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날 보고 웃으면서 말한다.


'아저씨. 무슨 여자를 갑자기 그렇게 확 잡아당겨요? 간 떨어져 죽을뻔했네. 휴...'


'그래, 사모님 걸어가시는데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해 물을 늦게 발견한 내 잘못이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고마워. 됐죠? 근데 아저씨 생각보다 힘세다. 오 팔근육!'


고마워. 그런데 어째 칭찬같이 안 들린다? '생각보다' 세다니... 또 장난 시작이니?


'요즘에 나 헬스 하잖아. 나 정도면 평균 이상은 돼.'


'그래 봤자 비, 권상우에 비하면 아직 멀었거든요 아저씨?'


그래. 그건 나도 인정. 근데 한 번만 더 조인성, 권상우 타령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손시연


한채영, 김태희 세트로 너랑 비교 분석해줄게. 그때 가서 상처받았니 뭐니 해야 소용없어.


'여기 맛있을 거 같다. 부대찌개 좋아해?'


'그럼요. 완전 좋아함. 여기서 먹어요.'


식탁에 앉자, 손시연이 수저를 챙겨주고 나는 물을 따라준다. 생각보다 호흡 잘 맞는 거 같아 우리. 다


른 여자 만날 때는 수저 챙겨주고, 물 따라주는 거부터가 신경 써야 될 부분이었는데... 부대찌개가 나온다.


맛있게 먹어. 너 잘 먹는 모습이 좋더라 나는.


'그러고 보니 너 음식 가리지 않고 정말 잘 먹는다. 완전 잡식동물 같아. 너네 집에 밥값 엄청 나오겠다.


너 그러다가 고3 때 되면 살 엄청 찐다.'


'우와... 사람 보고 잡식동물이래. 원래 공부하고 나면 배고프거든요? 그리고 나 살 안 찌는 체질이거든


요? 내가 밥을 많이 먹든 말든.'


손시연이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러다가 정들겠다.


'알았어 많이 많이 먹어. 밥 하나 더 시켜줘? 너 모자라지? 표정 보니까 정말 모자란데?'


'네 정말 모자라요 지금. 근데 됐어요. 그냥 집에 가서 저녁 한번 더 먹어야겠다.'


하기야. 하나 더 먹기에는 여기 너무 밥을 많이 퍼준다. 그리고 집에서 한번 더 먹기는 무슨.


'근데 아저씨. 동창회 몇 시까지 가야 돼요? 나 때문에 늦는 거 아니에요?'


아, 동창회 가야지.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만나서 놀고 있다고 문자 왔었는데. 7시 30분이네. 그만


일어서자 우리.


손시연과 나는 지하철을 같이 탔다. 성수에서 손시연이 내리고 나는 곧장 강남으로 가면 된다. 성수에


가까워 올 즈음에 손시연이 말했다.


'맞다. 아저씨 다음부터 학원 토요일에 30분 일찍 끝난대요. 6시 반에. 아, 역 다 왔다. 아저씨 동창회


재밌게 놀고 와요. 갈게요.'


다음부터 6시 반에 끝난다고? 아, 오늘 그래서 10분이나 일찍 왔는데 아무도 없이 너 혼자 기다리고 있


었던 거구나. 일찍 끝나게 됐다고 말을 하지. 별로 참을성도 없으면서.... 너 은근히 나 미안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어. 다음부터는 안 늦을게. 정말로.


강남역에서 내린 나는 동창들이 기다리고 있는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8시가 넘어선 시간이다. 저기 있


다. 고등학교 친구들. 와. 생각보다 많이 와있네.


'최성민이다. 야 성민아. 여기야 여기!'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김현석이 나를 보고 반갑게 부른다. 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정말


많네 반갑다 진짜 내가 재수하느라고 그동안 연락도 잘 못하고.... 미안하다,


'야 최성민!'


'어?! 김창수!'


오랜만이다. 김창수 이거 거의 1년 반 만이지 우리? 한때 라이벌이었는데, 왜 이렇게 반갑지? 역시 멋


있는 건 그대로구나. 자식.


'최성민 너 멋있는 건 그대로네 오랜만이다. 인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인마. 반갑다. 반가워, 너 학교에서 완전 잘 나간다며?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디서 그런 헛소문이 도냐? 야 여기 내 옆에 앉아라'


'오 우리 학교 엘리트 2명이 모이셨네. 자 기념으로 다 같이 한잔 마시자! 최성민, 너 회비 만원 내는 거


잊지 말고 저기 하얀이한테 내.'


엘리트는 무슨... 역시 민석이가 분위기를 주도하며 술을 한 잔씩 따르게 한다. 나는 술을 한잔 마시고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나서 인사를 나눴다.


나는 또 다른 아이들과 인사하기 위해 어떤 테이블로 다가간다. 그때였다. 갑자기 놀라서 머리가 하얘지


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턱하고 막힌다. 뭔가가 머리를 세게 때리고 지나가는 느낌도 든다. 강소영이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회에 강소영이 오지 말란 법은 없지. 젠장, 눈이 마주쳤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 정말이지 최악이다. 이런 상황.


'안녕, 연대 갔다는 말 들었어. 오랜만이네...'


어색함이 싫었는지 강소영이 먼저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더 예뻐졌네. 대학생 되니까 패션부터가 달라


진 것 같고. 그런데 대단하다 너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흔한 친구였던 것처럼 말을 건넬 수 있는 거야?


네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나는 여기 오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눈 마주치고 쳐다보지 말아줘. 나는 아직 예


전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단 말이야.


'응 오랜만이다 소영아.'


분위기가 어색한 걸 눈치챘는지 민석이가 날 끌어당겨서 다른 테이블로 데리고 간다..


'야 어디 숨어있었어? 이 자식. 저기 너 술 먹이려고 안달 난 애들 많으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빨리 


오지?'


민석이 덕에 나는 그 테이블에서 발을 뗄 수 있었다. 다른 쪽 테이블로 가면서 민석이가 말한다.


'소영이도 동창회 할 때마다 자주 참석했어. 너한테 말해줄 걸 그랬다. 괜찮지 너?'


'응.. 뭐 다 옛날 일인데, 근데 좀 어색하긴 하다. 저쪽 테이블 다시 갈 용기는 안 나.'


원래 있던 테이블로 가 앉는다. 거기서 친하게 지냈던 동창들 몇 명과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빨리 강소


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김창수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에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는다.


'너희들 그 영어 선생 알지? 이티 말이야 이티. 우리 그때 단체로 야자 땡 까고 도망치다가 이티한테 걸려


서 완전 혼났었잖아. 부모님한테까지 연락 다 돌리고. 나랑 성민이랑 대표로 50대씩 대걸레


봉으로 얻어맞고.'


'맞아. 여자애들 울고 난리 났었지. 김기웅 선생님이지? 오랜만에 보고 싶다. 뭐 하시냐 요즘?'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어. 그래도 우리 많이 예뻐했었는데.'


고등학교 때 추억은 얘기해도 얘기해도 끝이 없다. 생각해보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우리는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계속 그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끊임없이 소주와 맥주잔


이 오고 갔다. 벌써 취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한둘이 아니다. 술이 센 편인 나도 약간 취기가 돌


정도였다. 어? 김창수 너도 완전히 취했네 아까 우리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창수야 괜찮아?'


'어... 아 완전 많이 마셨네. 다리 힘 빠졌다. 야 나 좀 부축해 주라.'


나는 김창수를 부축해준다.


'야 잠깐 밖에 나가자. 너 바람 좀 쐬어야겠다.'


부축해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앞에 있는 화장실에서 누군가 나온다. 강소영이다. 나랑 취한 창수를


보더니 놀라는 표정이다. 아씨. 일부러 다시 안 보려고 했는데 왜 또 너랑 마주치지?


'야 너네 괜찮아..? 둘이 옷에 뭐가 그렇게 많이 묻었어? 잠깐만.'


강소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우리 둘 옷을 털어준다. 소영아, 제발 이러지 마. 넌


안 어색해 지금? 나 너랑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머리가 복잡하단 말이야 정말로


'괜찮아. 안 그래도 돼 나 잠깐 창수랑 밖에 나갔다 올게. 애들이랑 잘 놀고 있어.'


창수를 데리고 술집 밖으로 나가자 몇몇 동창들이 밖에서 전화를 받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성민아, 지금 속이 완전 쉣이다. 애들 없는데, 저 골목으로 좀 가자


골목으로 가자마자 창수는 구석에서 구역질을 한다. 나는 말없이 뒤에서 등을 두드려준다. 원래 잘


안 취하고 자기 관리 잘하는 녀석이 오늘 왜 이래?


구토가 끝나자 나는 창수에게 근처 편의점에서 여명 808하나를 사서 건네주었다. 창수가 숨을 한번


내쉬더니 그걸 마신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성민아.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마침 잘 됐다. 말해도 되지?'


'당연하지 무슨 말인데 인마. 걱정하지 말고 해 다 들어줄게.'


창수는 나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결심했다는 듯 이야기를 꺼낸다.


'나......... 소영이 좋아했었잖아. 아무한테도 말 못했어도, 너한테는 말한 거 같은데.. 기억나지? 요즘에 나


소영이랑 만난다. 사귀지는 않는데, 만나고는 있어. 저번 동창회에서 만난 뒤로 연락했거든. 너 이제


소영이랑 안 사귀는 거 맞지? 나... 이래도 괜찮은 거냐?'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추억 저편에 숨어져있던 기억들이 내 의사


는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다가온다. 그래, 지금 이 장면 낯이 익다. 분명 똑같은 상황이었어. 내 기억


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파노라마는 2002년의 어느 시점에서 정확히 멈추어 선다. 월드컵으로 우리들


이 한껏 흥분해 있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다.


#9. 2002년 6월 4일, 그 후.


내 기억 속에서 멈춰 선 파노라마는 그 시점부터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억지로 숨겨둔 채 생


각하지 않았던 기억이라서 그런가? 마치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에 노출된 것처럼 눈이 부시다.


하지만 점차 적응이 된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뜨겁다.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몰려나와 응원을 펼치고 노래를 부른다.


환희와 생동감이 넘친다는 표현이 옳다. 그렇게 폴란드전을 앞둔 6월 4일, 국가대표 선수도 아닌 주제


에 나는 내 방에서 휴대폰을 붙잡고 초조해하고 있다. 그냥 문자로 보낼까? 아니야. 찌질해 보여 그건


남자답게 눈 딱 감고 전화하자 그런데.. 거절당하면 쪽팔릴 거 같아. 그래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고 전


화해보자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손해 볼 건 없는 거잖아? 나 자신을 합리화 시켜보자. 거절당했을 


때의 쪽팔림과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도피처를 일단 마련해 두 자. 안되더라도 쿨하게 가는 거다. 최


성민.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지? 생각할 시간 좀 더 주지. 이러다 경기 시작하겠다. 그냥 친구 놈들이랑


같이 볼까? 제발. 나약한 생각 집어치우자. 그냥 통화 버튼 누르자 이 쿨하지 못한 녀석아.


강소영이라고 등록된 번호로 신호가 간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보세요?'


'어.... 소영아! 나야 성민이 너 지금 집이야?'


'응. 너한테 전화 온 거 처음인 거 같다 야. 무슨 일이야?'


'오늘 축구하잖아 광화문에 거리응원하러 안 갈래?'


내 입에서 왜 '안 갈래?'라는 말이 나왔을까. '가자!'라고 확신 있게 말했어야지. 이런 사소한 게 분위기


를 좌우한다고 정신 좀 차리자.


'거리응원? 누구누구 가는데?'


'아... 그게.... 그냥 주변에 사는 애들 몇 명 불러도 되는 거고, 그냥 만나서 생각해봐도 될 거 같은데...'


바보 같은 놈. 정말 말리고 있어 지금. 단둘이 보자고 단호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거니?


'근데 나 지금 동생 숙제 도와주고 있어서... 늦어질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동생 숙제 잘 도와주고... 학교에서 보자.'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냥 전화하지 말고 친구 놈들이랑 축구나 보러 갈 거 그랬


나. 와 근데 은근히 기분 다운된다. 아니야. 동생 숙제 도와줘야 한다잖아. 그냥 쿨하게 넘어가자.


아씨, 지질하게 보였으면 어쩌지? 그래 내 주제에 무슨 강소영이냐 그냥 남자 놈들이랑 어울려서 누구


는 개발이네 히딩크가 어쩌네 하면서 축구나 보자 나가자.


그런데 왠지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진다. 세수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


고 있는데 계속해서 쪽팔린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으니까 어째 잡생각만 드는 거 같다. 빨리 몸을 움직


여야지. 어디서 빨간 티 하나를 꺼내 입고. 나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벌써 폴란드 전이 시작했는지, 함성이 엄청나다 친구 놈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다.


정말이지 그 연락은 의외였다. 아니 의외라기보단 기뻤다. 그보다 더 떨리는 느낌의 전화가 내 생애에


있었을까?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시끄러워서 한쪽 귀를 막은 채로.


'어 소영아 왜?'


'나 방금 동생 숙제 다 끝났어. 와 거기 광화문이야? 엄청 시끄럽다. 지금 가도 돼?'


아싸 다행이다. 그럼 당연히 와도 되지. 민석아 미안한데 좀 이따가 봐야겠다. 형님이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응 지하철 출구 앞에서 기다릴게. 도착하면 연락해'


'빨간색 옷 입어야 되는 거야? 사람들 다 빨간색 옷 입고 있지?'


'그냥 티셔츠만 빨간색으로 입고 와.'


나는 그렇게 폴란드전이 시작된 얼마 뒤에 광화문에서 강소영을 만났다. 청치마에 빨간색 티셔츠. 아


직까지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강소영은 나 혼자만 기다리고 있는 게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 눈치였지


만, 이내 재밌게 응원하고 축구를 봤다. 나는 축구 규칙을 잘 모르는 소영이에게 뭔가 아는척하면서


설명을 해준다. 즐겁다. 이런 기분.


결국 한국이 폴란드를 2:0으로 누르고 월드컵 첫승을 기록한다. 거리 응원을 나왔던. 사람들은 서로 부


둥켜 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그래, 나도 정말 기분이 좋다.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너와


단둘이 이렇게 밖에서 만난 건 처음이니까. 너랑 이렇게 웃고 떠든 것도 처음이니까.


던킨도넛에서 시원한 걸 마시면서, 우리 둘은 계속 축구 얘기를 했다.


'와 진짜 감동적이야. 난 축구 한 번도 안 해보고 축구 규칙도 잘 몰랐거든. 너 때문에 많이 배운 거 같아.'


'그치? 16강 갈 수 있을 거 같아. 사람들 이렇게 많이 나올지 몰랐는데 정말 많더라.'


강소영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은 기분이었다. 고작 한번같이 만난 주


제에.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나는 오늘 그 자체로 즐거우니까.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임


원 회의에서 강소영을 만났고 한눈에 반했다. 변변히 말도 못 붙이다가. 우연히 학교 행사를 같이 준비


하게 되면서 전화번호도 알게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나는.


민석이한테 한번 더 연락이 온다. 이 녀석 진짜 보채네 알았다 알았어.


'야 너 어디야? 답문도 안 하고 축구 다 끝날 때까지 어디 있었어? 첫승이다 첫승!'


'아 그럴 일이 좀 있었다. 지금 어디냐? 몇 명정도 모였어?'


'다섯 명 모여있다. 빨리 와 이 형님이 다 세팅해놨으니까.'


친구들이 있는 공원으로 가니 벌써 치킨도 시켜놓고 난리도 아니다. 월드컵 첫승으로 다들 흥분해 있


다. 내가 그쪽으로 가서 앉자 누가 내 어깨를 툭하고 친다. 김창수다.


'같이 좀 보지. 어디 가 있었어? 오늘 응원할 때 대박이었는데. 우리 옆에 정말 예쁜 대학생 누나들 있었


다. 골 넣고 나서 정말 기뻐서 서로 끌어안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민석이 저놈이 일부러 그 누나들


옆에서 예쁨받고 장난도 아니었어. 부럽지 부럽지?'


근데 별로 안 부럽네? 내 옆에도 예쁜 여자가 있었단다. 아니다... 나는 네가 부럽다 창수야.


김창수는 대단한 놈이다. 중학교 때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데도. 별로


범생이 티가 나지 않는 녀석이다. 우리 고등학교는 그다지 유명한 고등학교가 아니었다. 때문에 이 학교


를 배정받고 나서 나는. 문과 남자들 중에서는 적어도 1등을 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중


학교를 다닌 친구들도 내가 1등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나는 전교 등수는 그럭저럭 나왔지만. 항상 반에선 1등을 하지 못 했다. 내 위에


는 언제나 김창수가 있었다. 내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저 녀석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는 거 같은


데, 어떻게 된 거지? 원래부터 머리가 좋은 건가. 나는 김창수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했다. 창수를 한


번 이겨 보고 싶었다. 예비 형식으로 치른 사설 모의고사에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 치고는 높은 점수


를 받았지만 채점을 마친 김창수의 점수는 나보다 20점이 높았다. 그건 그 모의고사를 치른 전국에서


10등 안에 드는 점수였다. 반장 선거에서도 김창수는 항상 반장이고 나는 부반장이었다. 인정하기 싫지


만, 나는 노력파였고 김창수는 천재였다. 내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김창수를 향한 라이벌 의식이 싹텄


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친한 친구가 됐다. 친구를 향한 우정과 경쟁의식. 그런 관념이 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야 인마. 이 형님이 뭘 가져왔는지 잘 봐라.'


민석이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양주인 건 확실했다.


'어? 그거 양주잖아. 어디서 낫냐?'


'우리 집에서 몰래 가져왔다. 자 누구부터 마셔볼래?'


당시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생에 불과했다.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더라도 취할 때까지 많이 마셔본 일


은 없었고 게다가 양주를 마셔본 애들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로 주저했다. 그때 김창수가 나섰다.


'야 내가 한번 마셔볼게.'


역시 이런 일에서조차, 너는 나를 한발 앞서는구나. 김창수는 겁도 없이 양주를 종이컵에 따라서 벌컥


벌컥 바셨다. 다른 녀석들도 그제야 조금씩 따라서 양주 맛을 보기 시작한다. 다들 얼굴을 찡그린다.


'아 써 무슨 맛이 이러냐? 우리 아버진 이거 잘 마시던데. 목구멍이 정말 타는 거 같아.'


창수야 너는 괜찮니? 너 설마 술까지 센 거야?


하지만, 김창수도 양주를 한 번에 원샷하고 멀쩡할 정도로 술이 센 녀석은 아니었다. 얼굴이 빨갛게 되어


속이 안 좋은지 가슴 언저리를 주먹으로 친다.


'아 이거 갑자기 술기운 올라온다. 나 토해야겠어.'


창수는 공원 화장실로 가서 구역질을 시작했다. 내가 따라가서 등을 두드려 준다. 한 10분쯤 됐을까.


속이 좀 괜찮아졌는지 침을 한번 뱉고 옆에 있는 벤치로 가 앉는다.


'아 더럽게 어지럽네 다시는 안 마셔야지. 성민아 너는 괜찮냐?'


'난 조금밖에 안 마셔서 그러길래 뭘 그렇게 한 번에 원샷 해버리냐 자식아'


'그러게 토하니까 좀 낫네 야 성민아. 너밖에 없어서 하는 말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오케이?'


'뭔데? 나 입 무거운 거 모르냐?'


'나 6반 강소영 좋아한다. 임원회의 때 처음 봤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더라고. 너도 걔 알지?'


'어? 응...'


그럼 알지 강소영 왜 그랬는지 몰라도 솔직히 나는 그때 형태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멋있는


녀석이지 김창수. 이 녀석이 소영이를 좋아한다고? 오늘 강소영을 만나서 좋았던 기분이 일순간에 싹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혼란스럽다. 걱정스럽다.


'야, 나 나중에라도 고백하게 되면 좀 도와주라. 알았지?'


창수가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때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 그런데 그렇게는 못하게


어. 나랑 소영이랑 잘 될 수도 있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소영이를 포기할 수는 없어. 만약에 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든다면,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거야. 넌 정말 대단하고 인기도 많은 녀석이잖아.


꼭 강소영이 아니어도 되잖아.


그날 이후로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소영이에게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너를 좋


아한다고. 사귀고 싶다고 너랑 꼭 사귀어야 한다고. 이번에는 정말이지 단호했고 어물쩍 거리지도 안


았다.


그렇게 나는 강소영과 사귀게 됐다. 나는 소영이가 고백을 받아들인 그 시점에서도 김창수 생각이 났


다. 미안했다. 아니,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김창수는 어떻게 행동할까? 우리 사이에 혹시 끼어들지


는 않을까?


그러나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괜한 걱정이고 괜한 억측이었다. 그래 돌아보면 내가 못난 놈이


었다. 창수는 사랑보다는 우정을 중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영이와 사귄 뒤 처음 며칠간은 나


와 김창수의 사이가 어색했지만. 어느새 친한 친구 사이로 되돌아갔다. 김창수는 나와 소영이 사이에


끼어들기는커녕 소영이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배려였다. 오히려 소영이가 멋모르고 김


창수에게 인사 걸고 친한 척해도 창수는 무덤덤했다.


'야 김창수 애가 뭐 그러냐? 인사해도 잘 받아주지도 않고. 걔 나 싫어 하나?'


아니, 그 반대야 소영아.


김창수는 나와 이야기할 때, 더 이상 소영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보다 더 의외였던 것은 김창수


가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여자를 사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김창수는 주


변에 여자가 많은데도 아무도 사귀지를 않는 거지? 김창수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수줍게 고백을 해도


여 후배들이 반까지 찾아와 초콜릿을 건네고, 직접 만든 쿠션을 주면서 좋아한다고 해도. 김창수는 이


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학년 때 한 학교 후배와 드디어 사귀게 됐지만 그 관계는 채 한 달도 이어지지


못 했다.


그래, 내가 왜 지금에야 이걸 깨달았을까? 그놈은 역시 대단한 녀석이었다. 녀석은 강소영을 좋아하는


마음을 끝내 접지 못 했다. 하지만 친한 친구를 위해 양보를 하고 있었다. 친한 친구의 사랑에 끼어들만


큼 김창수는 비열한 놈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창수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지


만, 알고 보면 김창수는 날 위해 자기의 감정마저 포기해버릴 수 있는 놈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예상대로 김창수는 서울대에 합격했다. 나는 서울대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과


는 합격하기 힘든 대기번호였다. 나는 주저 없이 재수를 결정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소영이도 만류


했지만, 나는 확고했다.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창수에게 지기 싫었다.


파노라마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다. 골목길이다.


창수가 그런 김창수가 2002년 그날 이후 4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어렵게 소영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


다. 나는 창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솔직히 창수와 소영이가 사귄


다면,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그게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


기억의 굴레에 김창수와 강소영을 가둬둘 수가 없다.


'나 소영이랑 깨진지 1년도 넘었잖냐. 뭐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나는 상관 안 해.'


김창수와 나는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를 쳐다보았다.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창수가 비틀거리면 일어선


다.


'휴... 그래도 너한테 말하니까 속이 좀 편해진다. 야 나 이만 집에 가야겠다. 들어가자.'


'응 난 잠깐만 여기 앉아있다가 들어갈게 잘 가라 또 보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멍하게 하늘을 쳐다본다.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별반 달라지는 건 없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나는 가방을 챙기기 위해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집에 가자. 빨리 잠이나


자자. 술집에서 가방을 챙기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소영이다.


'성민아, 지금 가는 거야? 저기... 잠깐 이야기해도 돼? 오랜만에 봤는데.... 말도 못했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나는 소영이에게 화가 난 얼굴로 이렇게 몰아세웠다.


'야 강소영! 왜 그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 너한테 할 말 없어. 이제는 네 얼굴 보기도 싫고 그만하


자. 우리 제발.'


사실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 강소영의 표정을 돌아


보지도 않고 나는 술집을 나와버렸다. 요즘에 손시연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했었는데.... 가슴이 답답했


다. 재수시절, 나는 강소영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이내 끊었다. 그런 것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다.


나는 건물 앞에서 담배를 대여섯 개피나 연속으로 피우고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배터리가 나간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나는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자고 싶다.


#10. 고열


그렇게 나는 아팠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혼자서 아프다는 거 이렇게 서러운 거구나. 나는 집 밖


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하숙집 침대에서 계속 누워만 있었다. 혹시나 해서 서랍을 뒤져 예전에 약국에


서 사다 놓은 감기약을 한통 다 먹다시피 했지만 효과가 없다. 병원에 가야 할 텐데. 귀찮다. 아니, 일어


설 기운조차 없다.


지금 몇 시지? 무슨 요일일까? 헬스장도, 학원에도 며칠간 못 갔겠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을 수는 없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찬물이 피부에


닿으면서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내 감각을 깨운다.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다.


안 피우던 담배를 피워서 그런가? 입이 텁텁하고 목도 답답하다. 나는 물컵에 찬물을 따라서 마시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쪽에 던져두었던 휴대폰부터 충전기에 연결한다. 종료 버튼을 길게 꾹 누른


다. 월요일 밤 10시 오래도 누워있었구나.


휴대폰에서 연달아 진동이 울렸다. 그동안 밀렸던 문자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느라 아우성이다. 이봐


뭐 하다가 이제야 켜는 거야? 마치 이렇게 보채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잘 들어갔냐는 고등학교 친구


들의 문자와 반 친구들의 문자 언제 집에 내려오느냐는 어머니의 문자도 도착해있다. 나에게 특별한


문자도 하나 도착해있다. 손시연으로 부터다.


[아저씨 동창회 재밌었어요~?ㅎ]


일요일 점심 즈음에 도착했던 문자다. 내가 문자를 씹어버린 꼴이 되었네. 미안해


[폰이 꺼져있었어. 미안 지금 확인했네. 동창회 재밌었지~ 학교 잘다녀왔....]


다시 한 번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아 미치겠네. 정말 많이도 밀려 있었군. 손시연에게 문자를 마저 보


내고 새로 온 문자를 확인한다 하.. 어떡하지? 이번엔 강소영이다. 물론 소영이의 번호는 내 전화 목


록에서 예전에 지워버렸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전화번호까지 다 지워지지 않은 모양이다.


[잘 들어갔어...? 나 그날 정말 놀랐어..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이 문자 보면 연락해줘..]


제발. 내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거니? 대


학가더니 어장관리, 뭐 이런 거 하는 거야 지금? 내가 그렇게 바보 같아 보여? 넌 이렇게 쉽게 문자 보내


고 쉽게 말 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안 그래


재수 시작하면서 너한테 이별 통보받고 정말 힘들었어. 거의 한 달 동안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고. 매일 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다짐했어. 너를 완전히 잊어버리겠다고. 너에 대한 감정이나, 함께 했던


기억 같은 것도 다 지워 버리겠다고. 너랑 마주쳐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 내가 가슴속에서 밀어내자고 그렇게 겨우 조금씩 잊어갈 수 있었단 말이야 너를.


나는 착각했어. 내가 너와 나 사이를 주도한다고 생각했어. 넌 항상 내가 하자는 데로 잘 따라주는 편이


었고 내 기분도 잘 이해해 주려 노력했거든. 한 번도 큰 소리 내거나 화낸 적도 없었고. 그런데 아니야 우


리 사이의 주도권은 너에게 있었어. 난 약자였어. 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나는 반응해야 했고, 신경


써야 했고 가슴 아파야 했어. 네 생각에 괴로워하고 너를 잊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어. 그러니까 제발 그


만 하자 우리. 또 한번 너한테 화내기 싫어 정말이야. 우리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말고 보지도 말자.


꼭 그렇게 하자...


또다시 진동이 울린다. 이번엔 좀 더 길게 울리는 진동이다. 손시연이네 아 정신없다. 정말 신경이 날


키로워져서 그런가. 진동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어지러워.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난 언제나 건강한 놈이


었는데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여보세요?'


'어 아저씨다. 며칠 동안 폰 꺼놓고 뭐 했어요?'


미안하다 손시연 네 얼굴 바라보고 네 문자 볼 때마다 좋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좀 여유가 없어. 내가


내일쯤 다시 연락하면 안 될까?


'응... 좀 피곤해서 자고 있었어. 넌 뭐 해..?'


'어? 아저씨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와 귀신이구나. 응, 조금 아프네. 식상한 표현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래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


'아.... 아니,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가 봐 괜찮아.'


'그래요? 근데 왜 그렇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들리지? 아저씨 아프죠?'


'아니야 괜찮다니까... 무슨 일로 연락했어?'


'아프면, 병원 가요. 그냥 누워있으면 안 돼요.'


'안 아프다고. 안 아프다는데 대체 왜 그래!'


이런, 생각보다 목소리가 컸다. 아 진짜 못난 놈이다. 나 왜 아무 잘못 없는 손시연한테 이래. 바보 같


은 녀석아 어서 사과해 네 기분대로 상대방한테 아무렇게나 내뱉지 말란 말이야,


'아니 아저씨. 웃긴다 밑도 끝도 없이 왜 성질이에요. 갑자기?'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도 한 성깔 있는 앤데... 너무 내 기분만 생각했나 봐.


'아.. 미안 미안해 아팠었는데 지금은 나아졌어.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그런가 봐. 화난 거 아니지? 목


소리 높여서 정말 미안. 아까 화낸 거 취소할게. 지금 어디야?'


왜 대답 안 해? 어..? 전화 끊어졌다. 어쩌지? 얘 삐졌나 보다. 하기야 안 삐지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나름 걱정해서 전화해줬는데. 다짜고짜 성질이나 부리는 녀석을 누가 좋아하겠어? 손시연 말 틀린 게 하


나 없네. 네가 아니라 내가 진상이다. 진짜 이런 게 진상이 아니면 대체 뭐가 진상이겠니..


나는 마지막 남은 해열제를 입에다 털어 넣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힘없이 눈을 뜬다. 다행이다 어제에 비해서 훨씬 괜찮아졌다. 정말 불타는 것


같던 열도 조금 내려간 느낌이다. 며칠만 지나면 다 나을 것 같다. 아까 분명히 모닝콜 끄고 다시 누웠는


데, 누구지? 어, 손시연이네. 점심인데 무슨 일일까? 나한테 한판 쏘아붙이려고 그러는 건가? 그래. 차


라리 그렇게 해. 그래야 네 속도 편해지고 내 속도 좀 편해지겠어.


'응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아저씨 집이죠? 저 지금 신촌 가는 중이에요.'


'어? 지금? 너 어디쯤인데?'


'거의 다 왔어요. 15분이면 도착해요. 집 앞으로 갈게요. 내가 연락하면 나와요. 알았죠?'


다행히 화내지는 않네 성질 많이 죽었구나 손에 연 약속도 안 했는데 여길 왜 왔지? 내가 몸 좀 괜찮아


지면 다시 연락하려고 했는데.


세수만 대충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머리도 감을까 하다가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서 모자만 푹 눌


러 썼다. 집 밖으로 나가니까 벌써 손시연이 기다리고 있다.


'아저씨 진짜 아파 보인다. 안 그래도 삭은 얼굴 더 삭아 보여요.'


제발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 지으면서 갈구지 좀 마.


'걱정 마. 다 나았어. 야 어디 가서 좀 앉자.'


나는 손시연을 근처 할리스커피로 데려갔다. 근데 너 아까부터 계속 뭘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


꾸 쳐다봐?


'아저씨 완전히 초췌해요. 지금 병든 동.... 아니... 음.. 뭐랄까... 병든 짐승 같아요. 나랑 병원 갈래요?'


너 분명히 '동물'이라고 하려다가 '짐승'으로 말 바꿨어. 꼭 그런 어휘를 선택해야 돼? 와.. 몸도 안 좋은


데 기분 정말로 좋게 만든다. 눈물 나게 고마워. 너 저번에 내가 잡식동물이라 그래서 복수하는 거지?


'병원은 무슨. 괜찮다니깐. 며칠 동안 조금 열나고 그랬는데. 지금 다 나았어.'


'아니에요. 나 생각보다 힘 안 세서. 아저씨 쓰러지면 못 업고 가거든요? 아 약국 가면 되겠다! 열난다 그


했죠? 잠깐만 기다려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 갑자기 왜 이렇게 허겁지겁 이래? 누구 응급실이라도 실려가는 줄 알겠다. 야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뛰어가지 마. 보는 내가 걱정스럽다. 넘어지겠어. 이러다가 내가 널 업고 가야 될 거


같아. 잠시 뒤 약국에 갔던 손시연이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빈손이다.


'웅... 미안요. 지갑에 천원 밖에 없어요. 돈 좀 빌려줘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 알았죠?'


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아픈데 내 돈 내고 약 사 먹어야지 어쩌겠냐.


'야 그냥 내가 사 올게.'


'기왕 사 오기로 한 거, 내가 사 올게요. 3분 안에 갔다 오겠음.'


막무가내네.. 자 여기. 아니, 근데 네 지갑은 왜 나한테 주고 가? 무슨 물물교환하니 지금?


이번에는 빈손이 아니다. 손시연은 봉지에다 정말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약을 담아왔다. 고마워. 정


말 고맙기는 한데. 왜 이렇게 생명에 위협이 느껴질까? 너 약장사하는 거 같아. 저걸 다 먹었다가는 병


을 고치기는커녕 약에 중독되겠다. 누구 약 중독자 만들려고 그래?


어라, 너 또 왜 이렇게 정신없게 그래? 뭐 잃어버렸어?


'아 짜증 나. 지갑 놓고 왔나 보다. 약국 또 갔다 와야겠네. 아저씨 잠깐만...'


휴... 너 지갑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다만.


'야 스톱. 여깄어 여기 좀 진정하지?'


'언제 남의 지갑은 가져갔어요?'


말을 말자 갑자기 또 어지러워지려 그래. 너 정말 걱정돼서 온 거 맞아?


'약사 선생님이 이건 밥 먹고 30분 후에 한 알씩이고, 이건 뜨겁게 데워서 먹으면 되고... 이건 밤에 열나


면먹으면 된데요. 아! 그리고 이건 지금 먹으면 된데요.'


너 완전히 팔랑귀구나? 그 약사 자식은 왜 어린애 꼬드겨서 저렇게 약을 많이 팔아먹은 거야?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손시연, 너 수학여행 때 잡상인들 말 곧이곧대로 믿고 물건 사는 스타일이구나.


'이거 먹으라니까요?'


손시연이 내 눈앞에다 웬 약 숟가락을 하나 들이민다. 약에서 딸기향이 난다. 야 이건 아니잖아.


'이거 애들 먹는 감기 시럽이잖아. 됐어. 내가 이 나이에 이거 먹게 생겼냐?'


'어...? 나 저번에 열났을 때, 아빠가 비슷한 거 사다 줘서 먹었는데?'


'네가 그러니까 꼬꼬마지. 어른들은 이런 거 안 먹어.'


'참나. 사다 줘도 뭐라고 그러네. 알았어요. 먹지 마요.'


휴... 알았어. 먹을게. 설마 약 많이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냐. 먹자 먹어


'아저씨. 나 누구 아픈 거 진짜 싫어 한단 말이에요.'


가만, 너 또 진지한 표정 짓는다?


그래.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아 나. 그러고 보니 나도 똑같아. 가족 중에서 누구 한 명을 잃어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누가 아픈 게 정말 싫었어. 어머니가 아파서 누워만 계셔도 정말 불안했고. 또다시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를 떠나갈까 봐. 슬프다는 소리도 못 내고 또 그걸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봐.


하다못해 대학 친구들 중에 누가 아파도 약국 가서 약이라도 사다 줘야지 직성이 풀렸어. 너도 그렇구


나? 게다가 너는 중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해 그 기분. 아무튼 고맙다. 이


이렇게라도 신경 써줘서. 혼자라는 기분 들지 않게 해줘서.


잠깐만. 근데..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킁킁 거려? 냄새나니? 미안 나 요즘에 아파서 샤워할 힘도 없었다


구 그러니까 그렇게 불결한 물건 쳐다보듯이 바라보지 좀 말지?


'아저씨. 요즘에 씻지도 않았죠? 땀 냄새 진짜 난다. 웩. 수염 봐 원숭이 같아. 정말 지저분하다. 혼자 사


는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아까 일어나서 샤워하고 면도도 하려고 했는데, 네가 전화했잖아.'


'아저씨. 아무리 아프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게는 살아야죠. 좀 씻고 살아요.'


내가 대체 왜 이 어린 것한테 인간답게 살 것을 훈계 받고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아파서 서러워 죽겠는


데. 꼭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알았어. 앞으로 인간답게 살게. 됐지?


'아저씨. 나 곧바로 학교 가봐야 돼요. 지금 점심시간에 나온 거란 말이에요. 혼자 산다고 라면 같은 거 먹


지 말고 밥 좀 잘 챙겨 먹어요. 저 갈게요.'


너 점심시간에 나온 거였어? 이런, 괜히 아픈 거 티 냈나 봐 나. 무슨 양로원 할아버지가 봉사활동 나온 여


대생 만나러 온 거 같은 기분이야 지금.


'수업 안 끝났어? 그럼 뭣하러 학교에서 여기까지 왔어? 너 점심은 다 먹고 나온 거야?'


'남 걱정하지 말고 아저씨나 걱정하시죠? 전 팔팔하거든요? 늙어서 아프기나 하구.'


그래. 다 부실한 내 잘못이다. 나는 할리스 커피 앞에서 택시를 잡아서 손시연을 태워 보냈다.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날 밤 머리를 찌르던 두통도, 온몸에 나던 열도 씻은 듯이 다


사라졌다. 그 약사가 손시연을 꼬드겨서 팔아치운 약 때문에 그런 건 아닐 텐데. 어쨌든 나는 오래간만에 편


하게 두발 뻗고 잘 수가 있었다.


#11. 네 손


토익학원이 끝났다. 같이 수업을 듣는 여학생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빌려 갔던 펜을 돌려준다. 우리 학교


학생 이랬지? 예쁘네. 예전 같으면 괜히 신경 쓰이고 두근거리고 했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내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나는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오늘 헬스는 생략해야 한다. 지겹고 식상하기만 했던 신촌도 이제


달라 보인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매달려 있는 간판도, 얼룩덜룩한 아스팔트도 신선하게만 느껴진다.


정말이지 새롭다.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괜히 따라 웃고 싶은 생각이 든


다. 혹시 문자라도 도착해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해본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손시연은 아니고, 고등학교 동창 하얀이다.


'어. 정하얀! 갑자기 웬 전화질이야?'


'총무님이 전화하시는데 황송해 해야지 전화질이라니. 뭐 하냐 지금?'


'아, 나 지금 학원 끝나고 어디 가려고 하는 중인데. 왜?'


'너 신촌에서 산다며? 나 요즘에 홍대 근처에서 아르바이트하잖냐. 오늘 시간 돼? 밥이나 먹자.'


'아, 오늘은 일 있어서 안되는데. 너 언제 언제 일하는데. 금요일에 볼까?'


'오, 무슨 일? 너 혹시 여자 만나? 수상한데?'


미안하다 하얀아. 나 오늘 만날 사람이 있거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오늘은 손시연이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다. 시험 끝난 기념으로 만나자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


실 시험 때문에 만나는 건 아니다. 남녀 사이에서 만나야 할 이유를 찾는 건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냥 만나고 싶다. 그리고 보고 싶다.


고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벌써 몇 명은 나오고 있네. 와 쟤네는 고등학생이 저게 뭐니? 치마는 왜 저렇


게 줄여 입고 화장은 또 왜 저렇게 짙을까. 옆에 있는 남자애들은 또 뭐야. 정말 놀게 생겼어. 어린놈들


이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근데 나도 솔직히 할 말은 없구나. 아 저기 나온다. 손시연. 다행이다. 딱 맞


춰서 왔어. 이번에는 안 늦었네.


'정말 어려웠어요. 시험. 아저씨 땜에 점수도 못 맞춰보고 왔는데.'


그래. 콩깍지가 씌워서 그런 건진 몰라도 아까 교복 줄여 입고 그런 애들보다는 네가 훨씬 낫다. 잠깐만. 시


험 끝난 애가 왜 이렇게 샤방샤방해? 좀 쩔어있고 피곤한 얼굴을 해야 정상 아니야?


'야, 너 왜 이렇게 멀쩡해? 시험공부 안 했어?'


'아뇨. 열심히 했는데요? 며칠 동안 컨디션 관리하느라 잠을 좀 많이 자서 그래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컨디션 관리한다고 공부 안 하지... 이러면 네가 또 삐지겠지? 그래. 건강한 게 최


고지. 뭘 더 바라겠냐


'오늘 우리 학교 놀러 가자. 너 연대 가봤어?'


'재밌겠다. 한번 가보기는 했는데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어요. 그전에 우리 집 잠깐만 들려요. 옷 갈


아 입게. 대학교에 교복 입고 가면 정말 쪽팔리잖아요.'


'거기에 너한테 관심 있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 그냥 가지?'


'참내. 그냥 자기만족하려 그래요. 자기만족. 됐어요?'


그래. 네가 너 혼자 만족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니. 사복 입어라 입어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너희 집 앞까지 온 거 같아. 나름 예쁜 주택이네? 여기서 아빠랑 동생이랑 셋이서


사는 거야? 와. 나한테 몇 평만 떼어주지. 안 그래도 하숙집 좁아터져서 답답해 죽겠는데.


'아저씨. 나왔어요. 초스피드죠?'


초스피드기는. 나 지금 20분이나 기다린 거 알아? 근데 나 진짜 콩깍지 씌웠나 봐. 오늘 정말 예뻐 보인


다 너. 티도 잘 어울리고 청바지도 잘 어울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거 같아. 오늘은.


'교복 입으나 사복이나 똑같구만. 옷 바꿔 입는다고 외모가 개선되는 건 아니거든?'


'와. 이 아저씨가 어디서 외모 지적이야? 황당하다 진짜. 나 사복 입으면 친구들이 다 예쁘다고 그러고


이든요?'


'자기 입으로 자기가 예쁘데. 오늘 아주 큰 웃음 주는구나. 원래 여자들끼리는 서로 예쁘다고 해주는


거 몰라? 너 애들이 하는 말 그냥 믿었냐?'


나도 생각해보면 뒤끝 있는 놈인가 봐. 전에 너한테 한번 당했다고 오늘 너무 복수하는 거 같다 나. 이제


그만할게. 근데 그거 알아? 너 놀리고 반응 지켜보는 거, 정말 재밌어. 나쁜 뜻으로 이러는 거 절대 아


닌 것 알지?


지하철에 앉자마자 손시연이 갑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모의고사 시험지와 사인펜이다. 아니 이


걸 왜 여기서 꺼내? 설마 내가 예상하는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아저씨 때문에 빨리 나오느라고 채점도 못했잖아요. 자, 아저씨도 사인펜 하나 잡아요. 영어랑 사탐은


아저씨가 매겨요. 참고로 오늘 영어랑 사탐 풀 때 정말 느낌 좋았음.'


교복 입고 대학교 돌아다니면 쪽팔리는 건 아는 애가, 지하철에서 이러면 쪽팔리는 건 왜 모를까.


봐봐. 벌써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미소 지으면서 쳐다보고 있잖아. 지하철에서 시험 점수 매기는 여


고생과 그 옆에서 그걸 또 도와주고 있는 '아저씨'라고 불리는 삭아 보이는 남자의 조합을.


'아! 수학 또 70점 맞았어. 우.. 아저씨 영어랑 사탐 몇 점이에요? 그래도 제일 감 좋았는데.'


손시연, 대체 네가 말하는 '감이 좋다' 의 사전적 정의가 뭐냐? 앞으로 우리 만나는 시간 좀 줄여야 겠


다. 나는 채점한 시험지를 건네준다. 손시연은 곧바로 휴대폰을 눌러서 점수를 계산한다.


그래. 그래도 총점은 계산해 봐야지. 근데 조심해 손시연. 아까부터 주위 사람들, 안 그런척하면서 은


근히 너 몇 점 나올까 궁금해하고 있어. 네가 너무 소란스럽게 채점해서 그래. 그냥 너 혼자 조용히 계


산만해. 알았지? 동네방네 네 점수 다 소문 내지 말고.


'어... 421점이다...'


제발. 별로 높지도 않은 점수, 다른 사람들 다보는 앞에서 광고 좀 하지 마. 쪽팔리지도 않아? 김창수


가 언어영역 3번으로 다 찍고 잤어도 너보다 10점은 높게 나왔겠다. 다행히 실망하는 눈치기는 하네


그래. 그렇게 아쉬워하고 절치부심하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런 마음가짐으로 다음에 잘 보면 되지. 수고


했어. 아무튼


'완전 점수 낮다..... 에이, 뭐 어때 내신에도 안 들어가는 건데.'


휴... 그래. 매사 긍정적인 건 마음에 든다. 신촌 다 도착했다. 빨리 시험지 챙기고 일어나. 너랑 신촌 온


것도 꽤 오랜만인 거 같아.


우리는 신촌에서 저녁을 먹고 연세대로 갔다. 방학이지만 학교 안에는 학생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


다. 연인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 뭐가 그렇게 바쁜지 뛰어가고 있는 사람들. 나


역시도 저 중에 한 명이겠지. 근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우리도 이렇게 같이 걸어가니까 연인 사이


같지 않냐? 가만, 누가 고백하거나 사귀기로 한건 아니니까 연인 사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 건가. 우리


서로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도 없고. 손잡아 본 적도 없잖아.


'그래도 아저씨 때문에 연대도 구경하고. 고마워요. 근데 다리 아프다.... 아저씨 걸음 정말 빠른 거 알


죠? 늘 느끼는 거지만 따라가기 진짜 힘들어요. 어디 잠깐 앉으면 안 돼요?'


맞아. 나 걷는 속도 너무 빨라. 그래서 예전에 소영이도 맨날 천천히 좀 가라고 구박하고 그랬는데. 그


뒤로 여자랑 있을 때는 의식적으로 느리게 가려고 노력하는데, 그래도 너한테는 너무 빠른가 보네. 미안


해. 앞으로 너랑 있을 때는 좀 더 신경 써서 천천히 걸을게.


우리 너무 많이 걸었나 보다. 하기야 저번에 연세춘추에서 보니까 지하철역에서 우리 학교까지 1 km도


훨씬 넘는다고 하더라. 저기 대강당 앞 벤치에 앉자. 내가 음료수 뽑아 올게.


우리는 그렇게 대강당 앞에 있는 벤치에서 음료수를 먹으며 앉아 있었다. 그때 서로 많이 말을 나눈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편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너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있는데 대강당 앞을 지나가던 같은 반 여자애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온다.


'성민 오빠다. 오빠 여기서 뭐 해? 옆에 누구야?'


손시연 말하는 거야? 손시연이 손시연이지 누구겠니. 아, 너희들이 말하는 '누구냐'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지. 여자친구냐, 여동생이냐, 그냥 친구냐 뭐 이런 거 확인하고 싶은 거잖아. 잠깐만 막상 그러고 보


니까 애매하네. 대체 무슨 사이라고 해야 하는 거야. 우리? 아직 여자친구라고 말하기도 뭐 하고. 그렇


다고 그냥 친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빨리 생각해봐 최성민. 네가 대답 안 하고 있으니까 분위기 이상 해지


려고 하잖아.


'아.... 그냥 아는 동생이야. 너희들 어디 가?'


휴... 아는 동생이라고 해버렸어. 힐끔 손시연 쪽을 쳐다본다. 약간 실망한 얼굴이다 너? 미안. 그래도


쟤네들한테 내 여자친구요! 하기에는 우리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 안 그래?


'아저씨, 방금 저 언니들은 누구예요?'


'친구야. 같은 반 친구.'


'저 이제 다리 안 아파요.'


너 약간 퉁명스러워졌어. 삐졌니? 아주 조금 삐진 거 같기도 하네. 걔네들은 왜 하필 그때 거길 지나가


서 말이야. 나름 분위기 괜찮았었는데.


우리는 청송대로 갔다. 여름인데도 청송대는 시원하다. 공기도 좋다. 손시연도 기분이 많이 풀어진 눈


치다.


'와, 연대에 이런데도 있었네요? 나무 진짜 많다. 예뻐요.'


'여긴 청송대야. 너 청송대가 무슨 뜻인 줄 알아? 맞춰봐.'


'무슨 뜻인데요? 푸를 청, 소나무 송. 푸른 소나무... 이런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래. 들을 청에 소나무 송이어서 청송대래. 눈 감고 있으면 바람이 지나가면서


나무에서 소리가 나거든. 그때 소원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데.'


잠깐 이건 아닌데. 사실 소원 얘기는 내가 지어낸 거야. 왠지 로맨틱해 보여서. 뭔가 있어 보이잖아?


'이름 진짜 예쁘다. 소원 빌면 정말 이뤄진데요? 한번 해봐야지.'


손시연이 멈춰 서더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소원을 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 생각보다 진지한


모습이다. 어떡하느냐 얘 진짜로 믿었나 보네. 이제 거짓말이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내가 소원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손에 연이 천천히 눈을 뜬다.


'무슨 소원 빌었어?'


'비밀이에요 비밀. 근데 아저씨랑 요즘에 진짜 많이 만나는 거 같아요. 친구들보다도 더 많이 만나는 거


같음.'


'나도. 너 나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하숙집 앞에서.'


'그럼요. 아저씨 완전히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 그때 남의 물건이나 막 뺏어가고.'


나도 마찬가지거든? 어떤 교복 입은 애가 남의 하숙집 앞에서 담배나 피우려고 하는 걸 보고 얼마나 혀


를 끌끌 찼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이상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요 아저씨. 처음 이미지에 비해서는.'


역시 마찬가지야. '생각보다' 이상한 애가 아니었어 너.


청송대에서 둘이 걷고 있어서일까. 갑자기 분위기가 조금 묘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우리 손


도 한번 못 잡아본 사이네. 같이 손잡고 걷고 싶어. 괜찮지 그 정도는? 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 저기.. 손


좀 잡아봐도 될까? 그래야 되나? 아, 무슨 쌍팔년도 연애 드라마도 아니고. 여자 사귄 지 오래되니까 이


런 별것 아닌 일에도 감이 많이 떨어졌나 봐. 그냥 막무가내로 손잡아버리면 네 성격에 소리 지르고


변태니 어쩌니 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지는 못하겠고.... 어떡하지?


반대편에서 청송대 벤치에 앉은 어떤 커플들이 키스를 하고 있다. 와 팔자 좋구나 저것들. 어 근데 얘


왜 이렇게 민망해해? 대학생인데 뭐 저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거라고.


'저 사람들 완전 변태 같다. 아저씨 다른 쪽으로 가요.'


역시. 저런 걸 변태라고 하는 걸 보니 내가 손잡아도 반응은 뻔하겠구나. 그래도 나는 손을 잡고 싶어.


더 이상 주저하거나 혼자서 지질하게 계산하고 싶지는 않아.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손시연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다. 약간 놀란 거 같긴 해도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


네. 내 손이 차가운 편이라서 걱정했는데.. 대신에 네 손이 따뜻해서 괜찮은 거 같아. 부드럽다. 너 생각


보다 손 예쁘구나?


잠깐만이라도 이렇게 손잡고 걷자. 뻘쭘할 줄 알고 망설였는데. 의외로 하나도 안 뻘쭘해. 내가 왜 그랬을


까? 이렇게나 좋은데. 이렇게나 행복한데.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평범


한 연인으로 바라볼까, 아니면 여고생 와 대학생 커플이라면서 신기해할까? 아무렴 상관없다. 다른 사


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지금 너랑 손잡고 이렇게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3번 출구에 도착하자 손시연이 슬그머니 잡았던 손을 놓았다.


'학교 진짜 예쁘네요. 저 공부 열심히 해야겠어요. 고마워요 아저씨. 저 이제 갈게요.'


'많이 늦었으니까, 오늘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왠지 손시연과 좀 더 같이 있고 싶다. 우리는 성수에서 내려 손시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도 손을 잡고


걸었다. 이번에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자연스럽다.


그때 손시연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잡았던 손을 놓는다. 약간 당황한 눈치다. 얘가 왜 이러지?


저만치 앞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애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아. 네 동생이지? 진짜 신기해. 너랑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 너보다 좀 더 날카


롭게 생기긴 했지만.... 손시연 주니어야 완전히 더욱 염려스러운 건 성격까지 너랑 비슷한 거 같다. 어


째? 우리 쳐다보는 눈빛 좀 봐. 나 뭐 죄지은 거 있냐? 그래도.. 귀엽다.


'야! 너 왜 늦었는데 밖에 나와있어? 아저씨 저 들어갈게요. 고마워요. 바래다줘서.'


손시연은 동생 손을 잡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동생은 계속 뒤돌아보며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


다 본다.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 누구야 저 오빠는?'


'좀 조용히 해. 쪽팔려, 너 때문에. 넌 몰라도 되거든?'


'아빠한테 다 말한다? 누군데 누군데?'


'집에 가서 말하자 집에서. 좀 조용히 해! 입 막아버린다.'


손시연이 꼼짝도 못하는 상대가 있구나. 놀랄 일이네.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내내 티격태격하는 자매를 바라보다가, 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차가웠던 내


손이, 아직까지 따뜻하다.


#12. 시간


여름방학이 시작됐다고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다. 여름방학을 기준으로 정확히 여름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일이 굳이 방학에 맞춰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크게 변하는 건 없다. 그래도 시간


은 아주 조금씩 나와 내 주변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어서 빨리 자유로운 대학생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큰 변화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재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기


학원 책상에 죽치고 앉아있는다고 변하는 게 뭘까. 정체된 상태에서 1년을 버리는 건 아닐까. 온갖 생각


이 다 들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후에, 재수 이후에 나는 큰 변화를 겪었다. 나에게 시간은 그런 존재


였다. 모든 걸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변하게 만드는 


굳이 방학의 전과 후를 나누자면 방학 이후에 내 삶은 많이 달라졌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매일 생각하


고 행복해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나는 또 그렇게 변화해간다.


손시연도 여름방학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학교 다닐 때 보다 더 바쁘다고 울상이다. 아빠가 등록해준


종합반 학원이 너무 늦게 끝난다나 학원 덕분에 기대했던 것보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


어 들었다. 그래도 공부하는 애한테 학원 안 가고 같이 놀자고 할 수도 없고 너도 이제 곧 고3이잖아.


중요한 시기 그러고 보니까 고3 때는 더 바빠지겠네...


열시에 끝난다고 했지? 좀 늦긴 하다 정말. 셔틀버스 같은 것도 없다고 했는데 왜 학원에서 늦게 끝내


주면서 집에 데려다주지도 않는 거냐고. 요즘 이상한 놈들이 하도 설쳐서 얼마나 위험한데.... 잠깐만..


나 지금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런가 보네. 솔직히 걱정돼. 손시연 네 집까지 가는 길, 생각보다 어두침


침하고 인적도 드물어 보였다고.


소개팅할 때만 해도. 걱정된다기보다는 예의, 매너라고 생각해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한 거였는데. 지


금은 진짜로 걱정돼. 조금 귀찮긴 한데... 그래도 가봐야겠어. 지금 빨리 나가면 늦지는 않을 거 같네.


학원 앞에 도착해보니. 때맞춰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다. 이 시간에 정말 열심히들 공부하는


구나. 하기야 공부할 때 공부해야지. 나도 저 때는 열심히 공부했었다고.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나는 손시연에 이게 전화를 건다.


'어디야?'


'어 아저씨다. 나 지금 학원 끝나고 집에 가고 있는 중인데요.'


'나 지금 너네 학원 앞이야. 어디라고? 아 파리바게뜨 앞? 그리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벌써 나온 거야? 수업 끝나자마자 책 덮고 아주 쏜살같이 달려 나왔구나. 그날 배운 거 차분하게 한번 더


훑어보고 천천히 나오면 안 되는 거니? 응?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다. 나는 파리바게뜨 앞까지 뛰어간다. 손시연이 기다리고 있다.


'오 아저씨, 이 시간에 웬일로 학원까지 왔어요?'


'응...? 이 근처에서 친구 만나고 지금 막 헤어졌거든. 너 학원 끝나는 시간이랑 얼추 비슷하길래. 그


김에 데려다주려고 왔지.'


'잘 왔어요. 나 지금 완전 배고프거든요? 빵 사주세요. 아저씬 안 배고파요?'


난 괜찮아. 너나 많이 먹어. 나는 파리바게뜨에서 손시연에게 빵이랑 우유를 사줬다. 배고팠나 보네. 너


처럼 빵 맛있게 먹는 애 처음 본다. 너 정말 살 안 찌는 체질 맞나 보다. 난 밤늦게 그렇게 먹으면 다음날


바로 얼굴이 붓던데. 빵을 오물거리면서 손시연이 말한다.


'아저씨 우리 영화 보고 들어 갈래요?'


'영화? 지금이 몇 신데. 너 집에서 걱정 안 해?'


'오늘 아빠 외국으로 출장 갔거든요. 그래서 집에 동생밖에 없어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냥 나중에 보자. 지금 보면 12시는 넘어야 끝날 텐데, 안 피곤해? 너 꼬꼬마여서 어린이용 영화밖에


못 보잖아. 그리고 너 늦게 들어가면 네 동생도 밤늦게 혼자 집에 있어야 될 텐데.'


'아저씨 우리 아빠랑 똑같은 말한다. 그리고 내 동생은 나 안 들어오면 더 좋아할걸요. 아빠도 없으니


까 혼자 TV 보고 놀 수 있잖아요. 알았어요. 그럼 주말에 보든지 해요.'


그때 손시연의 휴대폰이 울린다. 아버지로부터다. 학원이 밤늦게 끝나니까, 잘 들어가고 있는지 걱정


돼서 전화하신 모양이다.


'응응 알았어요. 서현이? 잘 있어요. 오늘 친구들 만나서 저녁 먹고 들어왔데요. 아빠도 잘 도착했죠?


와 진짜? 그거 갖고 싶었는데. 완전 땡큐 아빠, 잘 다녀와요.'


'아버지야?'


'네, 일주일 동안 네덜란드 있다가 오시거든요. 걱정돼서 전화하셨나 봐요.'


'근데 학원이 왜 이렇게 밤늦게 끝나? 오전 반처럼 좀 더 일찍 끝나는 반은 없는 거야?'


'며칠 뒤에 학교에서 보충수업하잖아요. 그래서 오후반 등록한 거예요.'


아, 그렇지.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방학 때도 보충수업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방학 때 학교 다녔


었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데. 시간이 지나니까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


네.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게 되는.


'너 공부하는 애가 왜 치마를 입고 다녀? 게다가 밤늦게 돌아다녀야 되면서. 너 뉴스 안 봤어? 밤길여


성 노린 범죄, 이런 거 그냥 공부할 땐 편하게 바지 입고 다녀.'


잠깐, 나 지금 진짜 꽉 막힌 사람 같아 보였어. 여자애들한테 '왜 이렇게 계집애가 밤늦게 돌아다녀!'


이러는 사람들 보면 저 인간 정말 꽉 막혔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내가 지금 그 인간들이랑 똑같이


이러고 있네. 그래도 어떡하니. 정말 걱정되는걸.


'치마요? 오늘 나오다가 입을 거 없어서 그냥 입고 나온 건데요?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닌데요 뭘.'


'그리고 너 머리 너무 긴 거 아니야? 스트레이트 했지? 공부할 때 머리 흘러내려서 안 불편해?'


이건 더 오버한 거 같다. 진짜 별게 다 신경 쓰인다. 네가 밤늦게 치마 입는 것도, 머리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것도. 그냥 쿨하게 넘어가 주면 좀 좋을까.


'공부할 때는 묶고 하거든요? 아니, 왜 사람 머리가지고 시비에요?'


'대학 가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머리할 수 있잖아. 학교 다닐 때는 머리 같은 거에 신경 쓰지 말지? 너 신


경 쓰는 사람 아무도 없다니까?'


'아저씨 진짜 고리타분하다. 늙어서 그런가 봐. 어.. 근데 아저씨 지금 되게 덥나 보다. 땀 많이 흘려요.


등 쪽에 땀 때문에 막 젖었음.'


응 나 땀 많이 나는 편이야. 게다가 아까 늦을까 봐 막 뛰어왔다고. 근데 너 뭐 꺼내는 거야? 이젠 네가


가방에서 뭐 꺼낼 때마다 걱정되는 거 알아?


손시연이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더니 내 얼굴에 부채질을 해준다. 너한테 이런 센스도 있었구나. 시원


하다. 누가 나한테 이렇게 부채질해준 것도 오랜만인 거 같아. 정말


'시원하죠? 자요. 내가 30번 부쳐줬으니까 아저씨는 50번 부쳐줘요. 저 정확히 셀 거니까. 꼭 50번 해야


돼요. 제대로 안 하는 거는 안셀 거예요.'


역시. 웬일로 네가 먼저 순순히 부채질해준다 했지. 휴... 그리고 너 절대로 30번 안 부쳐 줬거든? 한


15번 정도 해준 거 같은데? 내가 알면서도 속아준다. 속아줘


'와 시원해. 아저씨 헬스한다면서요. 힘 뒀다 뭐 해요 이런 데라도 써야죠. 맞다! 헬스 시작한 기념으로


20번 더하기.'


네 마음대로 그런 편파적인 규칙 좀 정하지 마. 내가 너 부채질해주려고 돈 들여서 헬스한 줄 알아? 근


데 이거 은근히 팔 아프다. 그렇다고 쪼잔해 보이게 팔 아프다고 그만 둘 수도 없고 왠지 더 땀나는 거


같아.


'자 70번. 이제 네 차례야.'


'이제 그만. 나 시원하거든요~?'


안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부채질해줬는데, 이대로 물러설 순 없어.


그때 손시연이 웃으면서 공책을 뺏어가더니 팔짱을 낀다. 어? 너 나 못 움직이게 하려고 이러는 거지.


완전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그래도 기분 좋다. 처음 손잡았을 때랑 비슷한 거 같아. 부드러운 느낌


이제는 팔짱 끼고 걸어도 별로 안 어색하네. 근데 조금 부끄럽긴 하다. 이런 거 말하기는 좀 쪽팔리지만.


약간 떨려.


'있잖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돼?'


'네. 한번 들어보고요. 뭔데요?'


'그때 너 왜 하숙집 앞에서 담배 피우려고 했었던 거야?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아... 그때요?'


손시연이 고개를 돌려서 내 눈을 쳐다본다. 처음이야. 이렇게 서로 가까이서 눈을 쳐다본 적도 없었던


거 같아. 눈 크다 너. 눈동자도 까맣고, 쌍꺼풀도 예쁘고, 대학 가면 수술 같은 거 하지 마. 내 주변에 보면


여자애들 대학 갔다고 성형수술하고 하더라. 내가 보기엔 수술 안 해도 충분히 예쁘던데.


근데... 너 분명히 미소 짓고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여 맞아. 눈빛이 그래. 너 옆에서 보면 가


끔씩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슬퍼 보일 때 있는 거 알아?


'그냥 여러 가지로 짜증 나고 슬퍼지고 해서요. 그날이 엄마 생일이어서 엄마 생각도 나고...'


아. 어머니 중학교 때 어머니 돌아가셨으면 정말 슬펐겠다. 안 그래도 사춘기에다가 민감할 땐데.. 항


상 긍정적이고 밝게만 보였어 너. 그래서 그런 아픔이 있었는지 몰랐어. 미안해.


'그것 때문에 그랬구나 내가 말했나? 나는 아버지가 안 계셔.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


'정말요? 그렇구나... 오늘 처음 알았어요. 아저씨 은근히 나랑 비슷한 점 많은 거 같아요. 외모랑.. 성격


이랑... 주변 환경이랑.... 이런 거만 빼면'


저기,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외모' 가 다르다는 걸 왜 그렇게 강조해서 말해? 나도 알아. 나 안 잘생긴


거.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강조 좀 하지 마. 자기 안 멋있는 거 스스로 잘 아는 사람한테 너 안 멋있다고


확인사살하는 거만큼 잔인한 짓도 없는 거란다.


근데 말이야, 외모에 성격에 주변 환경까지 다르면 아예 공통점이 없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닐까? 하기야


너랑 나랑 하도 다르기 때문에 아주 조금 있는 공통점이 더 돋보이는 걸지도 몰라. 그리고 나 이제 공


통점 같은 거 찾지 않기로 했어. 그런 거 없어도 네가 좋아. 나는.


'내 생각엔 그래. 난 힘들거나 외로울 때 아버지 생각하면 힘이 나거든. 왠지 하늘에서 나를 계속 지켜


봐주시는 거 같은 느낌도 들고... 너는 안 그래? 꼭 직접 보고 직접 이야기 나눌 순 없더라도, 그렇게 느


낄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다는 거 만으로도 마음이 편하잖아. 뭐 가끔씩 슬퍼지고 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아저씨 말 들으니까 진짜 그런 거 같아요. 고마워요. 그런 말해줘서. 그런 말해주는 사람 내 주변에 한


명도 없었는데...'


아니야, 사실 너 때문에 나도 아버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어. 방금 너한테 한 말 머릿속


에서 맴돌기만 했던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너한테 말하면서 더 선명하게 정리된 거 같아.


'그건 그렇고. 너네 집으로 가는 길 원래 이래? 되게 으슥하고 어둡잖아.'


'지름길이라서 그래요. 큰길로 가도 되는데 그렇게 가면 한 10분 정도 더 늦어진단 말이에요.'


아 큰길로 갈 수도 있구나. 그럼 이리로 가지 마. 걱정돼. 넌 겁도 없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다음부터는 큰 길로 가. 10분이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어두운 데로 가? 학원도 늦게 끝나면서.'


'아저씨 아까부터 계속 우리 아빠랑 똑같은 말한다. 근데 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 오~'


'걱정은 무슨, 넌 얼굴이 무기니까 괜찮아. 너 스스로 미사일 방어 체제를 구축하고 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와, 아저씨가 나 걱정해준다. 감동이다. 감동. 이게 웬일?'


제발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하지 좀 마. 그냥 좀 모른 척 넘어가 주면 안 돼? 이 나이 돼서 부끄럽게 만들어


야겠어? 그래 걱정돼 엄청. 자꾸 걱정되는 걸 어쩌라고.


'하기야 착각도 자유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앞으로 너 학원 끝날 때 와도 돼? 아버지가 데리러 오거나


하지 않아?'


'아빠가 학원 버스 없으면 데리러 온다고는 했는데... 정 아저씨가 오고 싶으면 아빠한테 학원 버스 타고


온다고 하죠 뭐.'


이건 뭐 자기가 선심 써주는 것처럼 말하네. 아니, 선심은 선심인가? 아버지 차 타고 오면 더 일찍 올 수 


있는 거잖아.


어느새 손시연 집 근처에 도착했다. 너 그거 알아? 너랑 있으면 시간 정말 빨리 지나가는 거. 그래서 가


끔 아쉬운 느낌 드는 거.


'너 동생 또 나와있는 거 아니냐? 저번에 보니까 완전히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던데?'


'아.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요즘에 나 완전히 약점 잡혀있는 거 알아요? 정말 귀엽죠 걔 학교에서 인


기짱이에요.'


'응. 언니 안 닮아서 나중에 크면 예쁘겠더라. 걔라도 예뻐야지. 다행이야.'


'또 또 아저씨가 외모 지적하면 어이가 없어요, 진심으로.'


손시연이 팔짱을 풀더니 집으로 들어간다. 다행히 오늘은 동생이 나와있지 않다.


잘 들어가. 그런데 있잖아. 우리 계속 이렇게 팔짱 끼고 걸어갈 수 있을까?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솔직히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많은 게 변했거든.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되돌아보면 나도 변하고 내 주변도 변했어.


우리만 해도 그래. 당장 몇 년만 있으면 너는 고3이고, 대학교 가야 하잖아. 나도 언젠가는 군대를 가야


하고, 졸업해서 직장도 가져야 할 거고,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야. 우리 주변


도 많이 변할 거고.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복잡해지고 싶지는 않아. 또다시 너와


나 사이에 바보같이 벽을 만들고 싶지도 않아.


넌 우리 사이에 있던 벽을 넘어서 나에게 다가와 줬어. 그러니까 다시 벽을 만들지 않을 거야. 나한테


필요한 건 벽을 만들어내는 우매함이 아니라, 앞으로 생기게 될 새로운 벽을 부술 술 있는 용기인지도


몰라.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 있을까? 앞으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이렇게 너랑 함께


였으면 좋겠어. 시간 탓이나 핑계 같은 거 더 이상 대고 싶지 않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어.


#13. 회상. 2008년 9월 28일. 서울


춥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더위가 계속될 줄 알았는데 어느새 춥다. 유난히 길었던 더위를 시


샘하기라도 한 걸까. 물을 줘야 생기를 찾을 수 있었던 화단의 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물을 주면 얼어


버린다. 얼어서 부서져버린다. 며칠 전만 해도 분명히 더웠는데. 그래서 반팔을 입어야 했었는데


#14. 대학로


연극을 보기로 했다. 사실 이전에 꼭 연극을 봐야겠다는 계획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전


학원을 마친 손시연을 데려다주면서 했던 이야기가 발단이 됐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인데 손시연은 지금


까지 연극을 본 적이 없었다.


'연극요? 뮤지컬은 아빠랑 동생이랑 몇 번 봤는데... 연극은 어릴 때 본 어린이 연극? 이런 거 말고는 본


적 없는데요?'


어린이 연극이라면 피터팬, 아기공룡 둘리 뭐 그런 거? 역시 꼬꼬마. 그랬구나 맨날 신촌이랑 학원 근처


에서 영화만 보고 밥만 먹을게 아니라, 연극도 보고 대학로도 놀러 가고 할 걸 그랬네.


운 좋게도 나는 반 친구로부터 연극 티켓 두 장을 아주 싼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어느 잡지사


에 응모한 게 당첨돼 티켓을 받았는데 이미 본 연극이라 나에게 넘긴 거였다. 연극 이름은 오! 당신이 잠


든 사이. 나는 표를 얻자마자 이번 토요일에 연극을 보자고 손시연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그 극단의 홈


페이지에 들어가서 커플들에게 해주는 이벤트도 신청했다. 훗.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남자친구 아닌


가. 근데 이벤트 신청한 사람들이 뭐 이렇게 많아? 당첨될 확률은 별로 없겠다.


나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손시연을 만나 곧장 대학로로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학로는 신촌만큼이나


사람들로 붐빈다. 성균관대에 다니는 친구들 몇 명이 있는 터라 이 주변은 나에게 꽤나 익숙하다. 휴대


폰을 확인하니 연극이 시작되려면 한 시간 조금 안되게 남아있다.


'아저씨 나 배고프다. 점심 먹고 가요.'


너 밥 안 먹었어? 전에 내가 전화해서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시간 애매할지 모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 먹고 오라고. 네가 꼭 그렇게 하겠다며. 근데 지금 이렇게 천진한 얼굴로 배고프다고 밥 먹자고 하


면 어떻게 하니. 응? 난 너 만나러 오기 전에 이미 먹었다고.


'배고파?'


'그럼 점심시간도 넘었는데 당연히 배고프죠. 아저씬 배 안 고파요?'


응. 전혀 하숙집에서 밥 두 그릇에 계란 프라이까지 해 먹고 왔거든. 이거 완전히 적반하장이네


'아... 먹어야지! 시간 별로 없으니까. 어디 잠깐 앉아서 먹을 때 없나? 롯데리아 갈래?'


'햄버거 별론데. 밥 먹고 싶어요 밥.'


먹을 때만큼은 자기주장이 정말 확실해 너 이 잡식동물...이라고 하면 너 또 삐질 거야 그지? 그래 좋


은 게 좋은 거라고. 어린애 데리고 다니는데 밥은 잘 먹여야지. 이 근처에 밥을 먹을만한 데가 있으려나.


'시간 없다면서요. 아무 데나 들어가요. 여기 밥집인 거 같은데? 여기가요.'


멈춰봐. 거긴 기사 식장이잖아. 식당 앞에 택시들만 왕창 서있는 거 안 보여? 아무리 본능적으로 배고파


도 기사님들만 있는 식당에서 여고생이 '여기 김치찌개 하나요!' 하기에는 좀 부끄럽지 않니? 저기 횡


단보도 건너편에 버섯매운탕집 있네 저기로 가자.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런지 식당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시원한 자리를 찾아서 손시연을 데리고 앉


는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온다.


'나 이거 먹을래요. 아저씨도 같은 거?'


'응..? 난 안 먹을래. 너 혼자 시켜 먹어.'


'안 먹는다고요? 아저씨가 한 입만 달라고 해도 나 절대 안 줄 거거든요? 아. 돈 없구나? 내 건 내 돈으로


사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켜요.


아. 종업원 있는데서 제발 사람 한 명 불쌍한 인생으로 만들지 좀 마.


'아침을 늦게 먹어서 생각 없어서 그래. 안 뺏어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시키지 좀?'


'알았어요. 나 혼자만 시켜요 진짜? 저기요. 이거 하나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시연이 시킨 메뉴가 나온다. 아까부터 우리를 흥미 있게 바라보던 여종업원이 음식


을 식탁에다 놔주면서 웃는 얼굴로 묻는다.


'여자친구분이신가 봐요? 여동생이신가?'


이런 질문. 근데 이제 별로 난감한 거 같지는 않아.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아.


'맞춰봐요. 무슨 사이 같아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시연이 먼저 종업원에게 되묻는다.


'그러고 보니 남매라고 보기에는 외모가 좀 달라 보이는 거 같은데?'


와 그냥 말만 들어보면 전혀 나쁜 의미가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하지? '외모가 달라 보인다' 고


하는 부분에서 대체 내 눈치는 왜 보는 거야? 그렇기 해도 저 종업원 우리를 연인 사이로 본 거네


'네 여자친구 맞아요.'


'대학생? 여자친구분 예쁘시네요. 여자친구분 동안이시다. 맛있게 드세요.'


'여자친구분 예쁘시네요, 여자친구분 동안이시다.... 라 저 사람이 그냥 두 분 다 잘 어울리시네요.


두 분 다 동안이시네요. 이렇게 말해주면 안 돼? 게다가 손시연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인데 당연


히 동안처럼 보이지 원래 고등학교 저 나이 때 여자애들은 다 예뻐 보이는 거라고.


'봐요. 나 못생긴 얼굴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 아저씨 분이거든요?'


이런, 예기치 않은 종업원의 립 서비스로 손시연이 또 기고만장해하고 있다.


'너 옷 살 때도 종업원들이 예쁘다고 잘 어울린다고 하면 그 말 그대로 믿고서 옷 사지? 저거 다 립 서비스


란다. 너처럼 속는 애들 또 오라고 하는 거야. 밥이나 먹지? 식겠다.'


손시연이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래 늘 느끼는 거지만 이것저것 내숭떨면서 조금씩 먹는 여자보다는


잘 먹는 게 보기 좋다. 많이 먹어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맛있게 먹던 손시연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갑자기 찌개를 떠서 나한테 내


민다. 그래... 배부르니까 이제 내 생각이 조금 나니?


'자요. 아저씨도 먹어봐요. 정말 맛있어요.'


싫어 아까부터 버섯매운탕 떠서 쪽쪽 빨아먹던 숟가락이잖아. 저번에 아파서 며칠 안 씻고 다닌 거 때문


에 이미지가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 은근히 깔끔한 성격이라고 나는 손시연의 숟가를을 못 본 척 하


며 옆에 있던 수저통에서 새 숟가락을 꺼내서 찌개를 한 입 떠먹는다.


'한 입만 먹을게 한 입만 아 맛있네.'


'아저씨 내가 먹던 숟가락이 더러워요? 왜 내가 준 건 안 먹어요?'


응 더러워 농담이고 아무래도 네가 먹던 숟가락으로 먹기에는 아직까진 좀 그러네.


'응 약간 그냥 먹는 김에 새 걸로 먹으면 되지. 왜? 네가 여기 설거지해?'


'나 양치질 하루에 3번도 넘게 하거든요? 와 무슨 남자가 저러냐.'


오. 모든 남자들이 두려워한다는 '쪼잔하다 공격' 너도 그런 거 할 줄 아네. 남자애들 보면 여자애들이


'무슨 남자가 쪼잔하게...'라고만 하면 별 수 없이 그 애 말을 들어주게 되더라고. 쪼잔하게 보이기 싫은


거지 근데 쪼잔하다는 말 들었을 때 반응하는 사람이 진짜 쪼잔한 사람인 거 알아? 나한테는 그런 공격


안 통하거든?


'야, 다음 주말에도 어디 놀러 가고 하자. 토요일이 괜찮지? 너 뭐하고 싶은 거 있어?'


너 이제 보충수업도 시작하고 바쁘잖아. 학원 데려다주는 것 빼고는 평일에 보기 힘들고 그러니까 주


말에 뭐 할지 정해보자.'


'그럼 우리 한 개씩 하고 싶은 거 말하기 해요. 대신 무조건 들어주기 알았죠? 아저씨부터 말해요.'


무조건 들어주기라. 진짜 무조건 들어주는 거지? 음 뭐가 좋을까.


'공포영화 보기 물리기 없음.'


'아. 싫어요~ 공포영화 절대 못 본다고 했잖아요. 다른 거 다른 거.'


너 지금 귀여운 척 앙탈 부리는 거야? 그럼 그렇지 무조건 들어주기는 무슨 그럼 또 뭐가 있지?


막상 생각해보려니까 떠오르는 게 별로 없네.


'그럼... 잠실로 야구 경기 보러 가기 어때?'


'야구요? 나 규칙 하나도 모르는데.... 박찬호 밖에 모르고... 박찬호 나와요?'


찬호 형은 지금 미국에 있다만... 쟤 분명히 야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게 분명해. 야구도 안되겠다.


이럴 줄 알았어 이건 뭐 다 싫다고 하네.


'알았어. 그럼 그냥 같이 광화문 가서 근처 구경하고 밥 먹자 오케이?'


'에이. 그럼 재미없잖아요. 알았어요. 공포영화 볼게요. 대신에 나는 두 개 말할 수 있기.'


왜 너랑 뭐 내기하거나 하면 편파적인 규칙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만들어 내는 거야? 그래. 무려 공


포영화도 봐주신다는데 뭘 못들어주겠니. 말해봐라 말해봐.


'음... 나 옷 사고할 때 옆에서 짐 들어주기랑... 몇 달 후에 내 생일날 학교로 와서 선물 주고 가기!'


이건 뭐... 나를 무슨 퀵서비스센터 직원으로 만들어 버리네. 뭐하고 싶냐. 어디서 놀고 싶냐를 물어봤


더니만... 그래 네가 학생인데 쇼핑해봤자 얼마나 많이 사겠니. 그리고 네 생일 11월이니까 아직 멀었


구. 반드시 점심 먹고 오라고 당부한 것도 일주일 만에 잊어버리는 애가 그걸 기억할리 없지.


어느새 연극 시작할 시간이 다 됐다. 우리는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으로 갔다.


그렇게 큰 규모의 극장은 아니었지만. 객석은 사람들로 꽉 찼다. 우리 자리는 중간쯤에 있었다. 손시연


도 매우 기대하는 눈빛이다.


객석이 어두워지더니 공연이 시작된다. 연극의 무대는 한 가톨릭 신부가 운영하는 허름한 병원이다. 손


시연을 닮은 성깔 있는 여고생 역할도 한 명 나온다. 공연 중간쯤일까. 어떤 한 남자배우가 무대 밖 객석


으로 나오더니 커플들을 지목해서 이벤트를 시작한다. 아 나도 저거 신청했는데.


'여기 손시연 씨 계십니까?'


와 당첨됐나 보다. 운이 좋네 야 손에 연 뭐 해? 네 이름 안 들려?


'야 손들어. 너 부르잖아.'


'어? 나 부르는 거예요? 내 이름 어떻게 알았지?'


어리둥절해하기는 진심으로 신기해하고 있어 후후. 내가 널 위해서 나름 신경 써서 이벤트 신청한 거


라구 기대해도 좋을 거야.


'손시연 씨? 옆에는 누구? 남자친구~? 흠'


음. 원래 이벤트가 저런 건가? 남자가 잘생기기는 했는데 목소리가 좀 느끼하군. 왜 이렇게 느끼한 눈빛


으로 손시연을 쳐다보는 거야?


'손시연. 당신 아버지 도둑이지? 난 다 알고 있어.'


관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다 함께 '왜요?'라고 외친다.


'당신이 어렸을 때 하늘나라에서 납치한 다음. 날개를 숨겨버렸으니까. 하하하.'


헉. 저런 어이없는 개그 하는 게 이벤트였어? 게다가 저 배우.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좋아하고 있어.


나는 슬쩍 손시연 쪽을 쳐다본다. 그래도 천사라고 해주니까 좋아하긴 하는구나. 단순하기는 저건 이


벤트 당첨된 커플 여자들한테 다 해주는 소린데. 그래도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기분은 좋아.


'옆에 남자친구 최성민 씨? 최성민 씨가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우유가 있어. 지금 줄까~?'


손시연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남자 배우가 느끼한 포즈로 손시연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소리친다.


'잘 들어봐. 아이~러브으 우유!'


윽. 제발 그만! 정말 민망해. 관객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즐거워한다. 아 씨 저 배우 입을 틀어막아버릴


수도 없고 손시연 넌 안 쪽팔려? 너 왜 이렇게 좋아해? 진짜 재밌어한다. 너


그 남자 배우는 공연 끝나고 열어보라면서 카드 한 장을 손시연에게 주고 다른 커플에게로 간다. 정작


신청한 나는 민망한데 다른 사람은 좋다고 웃네. 무슨 이벤트가 이래?


'와 우리 이름 어떻게 알았지? 신기하다. 저 사람 진짜 잘생겼죠?'


이거 어째 이벤트의 효과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거 같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좀 민망하긴 했어도 이


벤트 신청하길 잘한 거 같아. 어쨌든 네 기분이 더 좋아진 거 같으니까 연극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연


극이 끝나고 소극장을 나오면서 손시연은 남자배우가 준 카드를 꺼내본다.


[최성민♡손시연 두 분 예쁜 사랑하세요^^]


'아! 이거 아저씨가 부탁한 거구나? 맞죠? 오~정말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센스 있다. 아저씨


이건 기념으로 내가 가지고 갈게요.'


그걸 지금 알았니? 눈치도 빠르다. 우리는 소극장을 나와서 함께 대학로를 걸었다. 걸어 다니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때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좋다. 행복하다.


그때 손시연이 무언가 발견하고 내 팔을 잡아당긴다.


'아저씨. 우리 스티커 사진 찍어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 같이 찍은 사진도 없네. 사실 나 여자친구랑 사진 찍고 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았


거든, 싸이월드에서 커플 미니미 맺고 커플 사진 올리고 하는 것도 별로였어. 우리 사이를 남한테 자랑


하는 거처럼 보였거든. 그냥 서로 얼굴 보면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 그래서 소영이랑 같이 찍은 사진도 거의 없어. 소영이는 그런 부분을 늘 아쉬워


했었지만. 그래도 네가 이렇게 찍고 싶어 하니까 못 찍는다고는 못하겠다. 찍자 우리


사진을 다 찍고 나오려는데 손시연이 뒤에서 날 부른다.


'아저씨, 사진 골라야죠. 어디가요? 흠. 이건 내가 이상하게 나왔다... 이건 내가 눈 감았고...'


이거 완전 자기 잘 나오는 사진만 다 골라버리네. 내 사진도 좀 봐달라고.


'야. 나도 눈 감고 나온 거 있잖아 좀 내 거도 봐주지?'


'원래 이런 거는 여자가 잘 나온 거 고르는 거거든요? 사진 꾸미기도 해야 돼요 아저씨 먼저 해요.'


꾸미기도 해야 되는 거야? 하도 오랜만에 찍어보는 거라. 어떻게 해야 되지? 이걸 눌러서 별을 고르고..


다음은..


'아. 아저씨 진짜 느리다. 시간제한 있거든요? 그냥 내가 할게요.'


손시연이 다급하게 내 자리를 뺐더니 빠른 손놀림으로 화면을 콕콕 찍어서 스티커 사진을 꾸민다. 와


처음으로 네가 무지 든든해 보인다. 완전 전문가구나. 너? 스티커 사진 꾸미기 전문가. 손이 안 보여


손시연 덕분에 사진 꾸미기까지 무사히 마치고 기다리고 있자 사진이 나온다.


'와 잘 나왔다. 그러죠 거죠?'


아니. 순전히 너만 잘 나온 거겠지.


'아저씨 머리 진짜 크게 나왔다. 내 두 배다 두 배.'


윽. 그건 네가 뒤로 가고 내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아저씨 이거 휴대폰에다 붙여요. 난 아빠가 보면 안 되니까 지갑 안에다가 붙일게요. 알았죠?'


사실, 나 이런 거 부끄러워서 별로 싫어하는데 그냥 나도 지갑 같은데다가 붙여놓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보고 싶다고. 나중에 너 몰래 다른데다 붙여놔야겠다.


'저녁 먹어야지? 뭐 먹을래?'


'오늘은 집에서 아빠랑 동생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요. 아빠가 저녁해 준다고 들어오래요.'


하기야 주말 저녁인데 집에서 가족이랑 먹어야지. 아버지가 되게 가정적인 분이신가 보네. 직접 저녁도


해주시고 그런 아버지가 있어서 네 성격이 그렇게 밝은가 봐 나도 나중에 내 자식들한테 직접 음식도


해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했나? 지하철 안에서 손시연이 꾸벅꾸벅 존다. 지하철이 흔들리는데 맞춰


고개가 흔들린다. 나는 자세를 고쳐서 손시연이 내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해준다. 너 진짜 천진난만하게


잔다. 수업 때도 이렇게 조는 건 아니겠지?


어느새 성수역이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은데. 야 손시연 일어나 집에 가야지


헤어지기 전 손시연이 내 손에 깍지를 끼고 흔들면서 말한다.


'아저씨 오늘 고마웠어요. 연극도 엄청 재밌었어요. 또 봐요.'


응. 잘 가 나도 고마웠어. 손시연이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도 발걸음을 되돌린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집에서 저녁 해 먹어야겠네. 뭘 해 먹을까. 손시연 말대로 라면 끓여먹지 말고 밥 먹어야겠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오, 손시연? 네가 헤어지고 나서 고맙다는 문자도 보내? 웬일이


냐. 그래도 기분 좋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15. 과거라는 이름 


그날 손시연과 헤어질 때쯤 도착했던 문자는 손시연이 보낸 게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문자는 다름


아님 동창 하얀이로부터였다. 아 맞다. 하얀이랑 만나기로 했었지. 맨날 손시연이랑 붙어 다니다 보니


까 잊고 있었네. 하얀이랑 약속 잡은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아무리 친구라지만 여자애 한


테 두 번이나 먼저 연락 오게 만들다니. 최성민, 너 정말 비매너야.


결국 나는 하얀이와 홍대 근처에서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신촌에 사는 민석이도 같이


보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민석이가 우리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야, 너 혼자 어떻게 들어왔어?'


'너네 하숙집 비밀번호 정도는 이미 다 꽤고 있거든? 내가 여기 출입한지도 벌써 몇 개월인데.'


민석이는 자기 집인 양 내 침대에 뒤로 털썩 눕다가 곧바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얼굴 한가득 특유의


부담스러운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말한다.


'나 성공했다.'


성공? 어떤 성공을 했다는 거야. 자세히 좀 말하지?


'뭘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만 봐. 나 전에 후배 여자애 사귀기로 했다고, 이 형님이 나보다 키 크고 자생


긴 3명의 경쟁자를 무찌르고 고백에 성공했단 말이다.'


아, 맞다. 너 같은 반 후배한테 지른다고 몇 주 전부터 벼르고 있었지. 자식. 축하한다.


'너 보기보단 연애스킬이 좀 있나 보다? 여자친구한테 잘해줘 인마. 괜히 밀고 당기기 하거나 방심하지 말


고. 너 사귀기 시작한 첫 며칠 동안이 제일 위험한 거 알지?'


'안다 인마. 이제 나도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나.'


나도 안다 그 기분. 자식, 진짜 좋긴 좋나 보구나. 얼마 전만 해도 그 여자애 가슴이 어떠니 몸매가 어떠


네 시답지 않은 소리만 해대더니, 이제는 자기 여자친구 됐다고 그런 말도 자제하네. 그래 다 그런 거지


뭐. 네가 악의가 있어서 그런 소리를 했겠냐. 다 욕구불만의 표출이었겠지.


'고백은 어떻게 했는데?'


'응? 아 고백? 형님이 피아노 좀 치잖냐. 피아노 바 가서 칵테일 마시다가 피아노 쳐주고 고백했지. 역


시 여자는 분위기야. 바로 넘어오더라고. 솔직히 완전 무드 있지 않았겠냐? 안 그래?'


하기야, 너 외모랑은 안 어울리게 피아노 하나는 끝내주게 잘 치지. 나도 어렸을 때 피아노나 배워놓을 걸


그랬나. 다룰 수 있는 악기가 리코더 뭐 이딴 거 뿐이니 원.


'야 최성민. 근데 너는 뭐 좋은 소식 없어? 너도 소영이랑 깨진지 거의 2년이 다 돼가는 마당에. 너 아예


소영이랑 다시 사귀지 그러냐? 걔 1학년 때 사귀던 남자친구랑 깨진 뒤로 솔로라던데.'


또 강소영.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저 이름이. 과거의 기억이


'소영이 얘기 좀 그만하지. 야 안 그래도 나 너한테 말할 거 있어.'


그래, 이제 숨길 필요 없지. 제일 친한 놈한테 우선 말해보자. 당당하게 소문내고 다니자고 이제.


'사실 나도 최근에 여자 만나고 있어.'


민석이는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오, 진짜? 이 자식 드디어 암울한 인생에서 좀 벗어나겠구먼. 누구냐? 예뻐? 사진 좀 보자.'


나는 전에 찍은 스티커 사진을 보여준다. 민석이가 그걸 뚫어져라 쳐다본다.


'오우, 예쁘장한데? 근데 몸매 나온 사진은 없냐? 내 기준은 얼굴이 아니라 몸맨데.'


'이 자식이, 남의 여자친구 가지고 몸매라니. 몇 살로 보이냐?'


'사진으로만 봐서는 되게 싱싱해 보이는데? 신입생이냐?'


저 녀석 사람이 무슨 야채도 아니고 싱싱하다고? 표현하고는. 하기야 나는 얘한테 잡식동물이라고 놀


리는 마당인데 뭘.


'나랑 세 살 차이야 고등학생 빠른 90년생.'


그 말을 듣자마자 민석이는 오버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두 팔을 뻗어 보인다.


'90년생! 이 자식 얌전한 놈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능구렁이구만. 축하한다 어떻게 꼬셨냐 과외하다가


꼬신 거야?'


근데 이 녀석이 축하하는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 건 왜 일까?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고등학생이라


는 말 듣고도 비난하지 않고 축하해주는 걸 보니. 나 혼자 괜한 걱정한 건지도 몰라.


'꼬시고 뭐 그런 거 아니야 인마. 우리 진짜 나름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고.'


'그래그래. 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냐. 걔 대학 갈 때까지 속 썩이지 말고 이대로만 무럭무럭 잘 자라


게 해줘라 어떻게 만난 거야?'


어떻게 만났냐고? 그러고 보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랑 손시연의 첫 만남. 말로는 잘 설명이 안될 거


같아. 우연인 거 같기도 하고, 필연인 거 같기도 해. 악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손시연이 라이터


내놓으라고 울고불고 할 때만 해도 정말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그래 우연


이 아니라 필연이었는지도 몰라. 손시연이 하필 우리 하숙집 앞에서 그 시간에 담배 피우려고 한 거. 내가


하필 지갑을 놓고 와서 하숙집에 들러야 했던 거.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딱딱 맞아 떨어지


지 않니?


'뭐야 이 자식 왜 혼자 헤벌쭉 하고 있어? 정신 차려 인마 자세한 건 나중에 듣고, 나가자 하얀이 기


다리겠다.'


홍대는 신촌과 가까우면서도 매우 다른 분위기가 난다. 뭔가 예술의 냄새가 좀 더 짙다고나 할까. 패션


도 미묘하게 차이가 나고. 가게 인테리어나 길거리도 신촌과는 다른 느낌이 난다. 신촌에서만 지내다


보면 이런 홍대의 분위기가 가끔 어색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자유분방한 향기가 나는 홍대


에서 피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다.


'오 최성민, 구민석! 오랜만이다. 얼굴 보기 힘든 녀석들.'


하얀이가 홍대 정문 앞에서 우리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한다.


'전에 동창회 때 봤잖냐. 얼마나 오랜만이라고. 야 우리 뭐 먹을까?'


'아무거나 먹자. 아무거나.'


아무거 나라... 민석이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우리를 멈춰세우고 한가지 제안을 한다.


'시간도 8시 넘었고, 배고프지? 나 아는 곱창집 있는데 갈래? 하얀아 너 곱창 같은 거 먹을 수 있냐?'


하얀이가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민석이를 잡아끈다.


'너네보다 곱창, 순대 이런 거 훨씬 잘 먹거든? 걱정 말고 앞장서 구민석.'


우리는 민석이가 이끄는 데로 홍대의 어느 투박한 곱창집에 자리를 잡았다. 겉보기에는 허름한데 꽤나


많은 손님들로 가득 차있다. 백열등으로 밝히는 희미한 불빛에 고기 굽는 연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자. 곱창 먹는데 사이다만 먹을 수는 없지? 이모, 여기 참이슬 한 병요!'


하얀이는 여자인데도 정말 씩씩하다. 그래서 남녀 가릴 것 없이 주변에 친구가 많다. 그러고 보니까 하얀


이, 소영이랑 둘이서 제일 친했었는데. 고등학교 때 내가 너를 통해서 캐물었잖아. 소영이가 뭐 좋아 하


는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지금 나한테 삐져있는 건지.


'야, 생각해보니까 내 앞에 있는 남자애들 둘 다 대학 잘 갔네. 한 명은 연세대, 한 명은 서강대. 나중에 성


공하면 나 좀 잊지 말고 챙겨줘야 돼 알았지?'


성공은 무슨, 아직 우리 학교 안에서 공부하고 학점 따고 인간관계 맺어가기도 힘겨운데 아직 멀었어.


좀 더 노력해야지. 김창수 같은 녀석이 무조건 성공할 스타일이지. 벌써부터 서울대 내에서도 학점에서


톱을 달리고 있잖아 그 빡세다는 대학생 기자 활동을 같이 하면서도 말이야. 학점이든. 학내 활동이든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그런 녀석이 대단한 거지.


'넌 어디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거야?'


'응 아는 교수님 통해서 홍대에 있는 의류 디자인 업체에서 디자인 공부 뭐 이런 거 하고 있어. 솔직히


들어오는 돈은 별로 없는데.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뭐.'


고등학교 때 예체능계열이던 하얀이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은 서울산업대 미대에


다니고 있다. 내가 알아봤어 너 중학교 때부터 나랑 같은 학교였잖아. 교복 수선해서 입는 거 하며... 미


적 감각이 남달랐다고. 물론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왕창 혼났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곱창도 다 먹고 술도 한 병 다 마셨다. 우리는 2차 격으로 근처에 있


는 바로 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의 바다. 바에 온 것도 오랜


만이다. 손시연은 아직 꼬꼬마라서 같이 술을 마시거나 바에 올 수는 없다. 이런데 오려면 아직 1년 정


도는 기다려야 한다. 물론 본인은 술을 마실 수는 있다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여명 808


을 캔커피로 착각했던 걸로 봐서 거의 마신 경험이 없는 거 같다. 하기야, 담배도 어떻게 피우는지 몰라


서 쩔쩔매고 있었으니.


바에서 칵테일을 시켜서 마시고 있는데 민석이한테 전화가 온다. 민석이는 전화를 받더니 매우 저자세


로 굽신굽신 거린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응. 당연히 가야지. 잠깐만 기다려. 알았지? 오빠가 빨리 갈게.'


뭐야 저 자식 아주 사모님 하나 모시고 있구나. 자기가 엄청 주도하는척하더니 여자친구한테 쩔쩔매


고 있네. 그래 자기 여자친구한테 함부로 대하는 놈들보다야 네가 훨씬 낫다. 하얀이가 그런 민석이를 


재밌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야 구민석. 아까 말했던 네 여자친구지? 와~ 너 정말 잡혀사는구나?'


'아니야. 내가 좀 잘못해 논게 있어서 며칠간은 저자세로 나와야 돼. 나 먼저 간다. 또 연락


할게.'


민석이는 허겁지겁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다. 사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나랑


하얀이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웃는다. 하얀이가 땅콩을 하나 집어먹다가 내 잔을 보더니 묻는다.


'야 너 칵테일 하나 더 시켜줘?'


'됐어. 좀 쉬다 마셔야겠어.'


그때 내 휴대폰도 진동하기 시작한다. 손시연이 보낸 문자다.


[오늘 데려다주지도 않고! 정말 어두운데 외롭게 혼자 갔음ㅡ.ㅡ 나 버리고 친구들이랑 잘 놀고 있어요?]


미안. 하얀이랑 민석이가 지금 밖에 시간이 안돼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미리 연락했었잖아. 하루 정


도는 좀 봐주라.


답장하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하얀이가 말한다.


'너 문자 하면서 진짜 실실거리는 거 알아? 너도 여자친구 사귀냐?'


표정관리 좀 해야 되는데, 잘 안되네. 근데 너한테 여자친구 사귄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널 못 믿는 건 아니


지만 네가 알게 되면 곧바로 소영이도 알게 될 거 아니야. 잠깐, 나 지금 왜 강소영을 신경 쓰고 있는 거지?


이제는 신경 쓸 필요 없는 건데.


'최성민, 나 너한테 아까부터 할 말 있었는데. 소영이 얘기해도 될까? 괜찮아?'


또 강소영.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어. 난 언제나 다짐했다고. 강소영은 과거의 기억이라고. 과거의


이름이라고. 그런데 너네들은 그걸 자꾸 현재의 이름으로, 현재의 기억으로 가져오려고 해. 내가 그 굴


레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 줄 알아? 재수하면서 소영이에게서 벗어나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했는지, 매일 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하냐고.


'대답 안 하네? 그냥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너 왜 동창회 날 소영이한테 화내고 갔어? 너


가고 나서 소영이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내가 다독거리느라고 거의 한 시간 동안 소영이 옆에서 붙어


있었어. 너 나한테 밥 한번 사야 돼 그것만 생각하면.'


소영이가 울었었어? 그래, 그랬다면 나도 미안해. 울리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어. 사실 내


가 너무 힘들어서 얼굴을 마주 보기가 싫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쏘아붙이고 나온 거야. 뒤도 안돌아


보고 나갔어. 그래서 그렇게 울었는지도 몰랐어.


근데 그거 알아? 왜 내가 울어야 하고 가슴 아파야 할 때에 내가 아닌 소영이가 우는 거지? 내가 이별


통보받을 때도 그렇고 이별하고 나서 처음 동창회에서 봤을 때도 그래. 솔직히 말하자고. 슬퍼해야


할 건 강소영이 아니었어. 바로 나였다고. 내가 강소영을 붙잡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내가 너 때


문에 얼마나 실망하고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따졌어야 할 상황이었다고. 근데 왜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든


는 거야.


'그리고 그거 알아? 창수랑 소영이랑 요즘에 만나는 거. 아직 사귀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커플이나


다름없어. 창수 걔는 자기네 학교에서도 충분히 여자애들 사귈 수 있을 텐데. 굳이 멀리 있는 소영이를


찾아와서 만나더라고.'


창수가 나에게 소영이가 좋다고 고백할 때의 그 느낌. 그게 다시금 나를 휘감고 지나간다. 그렇구나... 결


국에 창수랑 소영이랑... 아니야. 내가 심란해할 필요는 없어. 창수는, 김창수는 나한테 말했어. 자기가


소영이 좋아해도 되는 거냐고. 내 얼굴 보고 직접 말했어. 4년 만이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러니까


김창수가 나한테 미안해야 할 필요도 없고 내가 심란해야 할 필요도 없는 거야.


'너랑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뭐 지금 이렇게 된 마당에 남녀관계에 끼어서 이러는 꼴도 참


우습기는 하지만, 내가 소영이랑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거 알지? 너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


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계속 대답하지 않고 애꿎은 물컵만 자꾸 들이켰다. 휴대폰이 또 한번 울린다. 손시연이다. 나는 바


로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답장을 보내는 손길이 내 손길이 아닌 것 같다. 혼란스럽다. 이런 기분


'너 소영이가 말렸는데도 재수한다고 마음 굳혔잖아. 그때 소영이가 맨날 우리 집 찾아와서 울고 하소연


하고 했어. 내가 그때 뭐랬냐구?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 이렇게 힘들어할 거면 최성민 잊


고 대학 가서 다른 남자 사귀라고 했었어. 1년이나 걸리는 재수하면서 냉정하게 소영이한테 대했던 네


가 미웠거든.'


내가 미워? 내가 냉정해? 하얀아. 네가 뭘 알아. 내가 재수하면서 소영이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창


수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에 얼마나 불타올랐었는지. 그런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


'너 재수학원 들어가고 나서 내가 계속 설득했어. 새롭게 시작하라고 소영이도 그 뒤로 너랑 이별하고


대학 가서 새롭게 시작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친구도 사귀고. 그 남자도 연대생이었네. 그러고 보


니까.'


'잠깐만.'


나는 하얀이의 말을 끊었다. 복잡하다. 내가 왜 소영이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난 지금 확실한


게 말할 수 있어. 난 손시연을 좋아해. 내 마음속에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손시연이야. 나


소영이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고 혼란스러워하기 싫어. 그건 손시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손시연은


지금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다른 여자 때문에 혼란스러워한다면 나 정말 나쁜 놈인 거야.


'하얀아.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나 솔직히 불편해. 소영이 얘기 계속 듣는 거.'


'하고 싶은 말? 그래 해줄게. 소영이 신입생일 때도 술 먹으면 너 얘기하고 했었어. 자기가 제대로 된 선


택을 한 건지 모르겠다고. 네 생각이 아직도 많이 나는데, 다시는 네 얼굴 보고 다가갈 수 없을 거 같다고.


너 연대 간다고 하니까, 소영이 좋아하더라? 그런데 술 많이 먹은 날 나한테 말하더라고. 어차피 첫 수


능 때도 고려대 붙었었는데, 왜 안 간 거냐고, 왜 재수를 했어야 했느냐고.'


이제는 재수해서 연대 온 거까지 네 입을 통해서 강소영한테 한마디 들어야 되는 거야? 서울대는 나랑 인


연이 아니었어. 그래, 수능 때 제 실력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내 실력이지. 내가 부족했던 거야. 어머니도.


혼자 계신데 더 이상 수능을 치를 수는 없었어. 그래서 연대 왔어.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거야?


'이야기 다 끝난 거야? 하얀아 미안해. 나 먼저 일어나도 될까? 나중에 다시 보자 우리.'


'너 아까부터 어린애같이 왜 이래! 소영이가 너한테 아직까지 마음 있데. 다시 사귀고 싶데. 됐어? 난 솔


직이 아무리 친구라지만 소영이 이해할 수 없어. 왜 그러는 건지. 왜 아직까지 너 같은 녀석 하나 못 잊고


힘들어하는 건지.'


뭐라고? 나는 일어선 채로 잠시 동안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지금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지? 여자들은 원래 이런 거야? 자기 마음대로 이별 통보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고


대학교 다니면서 남자친구 다 사귀고 나서 헤어지니까 그제야 내 생각이 조금 났니? 재수생 신분에


서 벗어나서 번듯한 연대생 되니까 이제 옛 기억이 떠올라?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건데. 그 기간 동안 힘들게 잊으려고 노력하고 가슴 아파했던 나는 뭐가 되는 거냐고.


다시 만나자고? 그런 식으로 다시 내 마음 휘저어 놓지 마. 난 이제 예전이랑 달라. 따로 사랑하는 사람


이 있어. 나는 손시연을 사랑해. 그 마음 이제는 변하지 않을 거야.


'너 연대 오고 나서도 소영이가 계속 나한테 말했어.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기가 먼저 연락해


도 되는 거냐고. 너한테 연락 온 적 없어?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래도 확실한 건 소영이가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창수랑 만나면서도 항상 뭔가 하나 잃어버린듯한 기분으로 지내야 했어. 소영이는.'


'그만하자 하얀아.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얘기 같아. 계산 내가 한다. 먼저 일어날게.'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이는 그런 나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 완전히 자기밖에 모르고 이기적인 거 알아? 소영이가 한번 만나재. 만나서 이야기나 해보재. 제발


연락 씹거나 대화 거부하거나 하지는 마. 그런 거 정말 예의가 아니야. 만나. 싫어도 만나서 싫다고 말해.


얼굴 직접 보고 싫다고 말하고 끝내. 더 이상 소영이 힘들게 하지 마.'


자기 밖에 몰라? 이기적? 소영이를 힘들게 해? 내가 왜 그런 소릴 들어야 되는데. 너 소영이랑 더 친한


친구라고 강소영 편 드는 거야 정에 하얀?


나는 바를 나와서 신촌까지 그대로 걸어갔다. 지하철을 타거나 할 기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흥분하는


거, 이것도 아직 과거에 얽매여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작은 부분에서부터 벗어나야 한


다. 강소영을 완전히 잊고 싶다. 손시연이 보고 싶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나도 모르게 손시연에게 전


화를 건다. 들린다 네 목소리.


'아저씨? 정말 밤늦게 웬일이에요? 거실에서 아빠랑 동생이랑 같이 TV 보고 있었단 말이에요.'


손시연이 아빠한테 통화하는 게 들릴까 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응? 그냥... 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아저씨 오늘 이상하다. 나한테 말 많다고 말 좀 줄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술 마셨어요?'


'조금. 취할 정도는 아니고. 너 아빠한테 걸릴 거 같으면 말 안 하고 있어도 돼.'


'알았어요. 할 말 있으면 해요.'


그런데 막상 할 말은 없다. 나는 그렇게 계속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서로 아무 말 없는 정적이 계속되자


손시연이 못 참고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보기에 아저씨 지금 되게 취한 거 같거든요? 왜요? 술 취한 김에 나한테 서운했던 거 꼬장 부리고 싶


어요? 잠깐 밖에 나와서 받을까요?'


'아니야 됐어. 그냥 내일 또 전화할게. TV 잘 보고 잘 자.'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신촌 하숙집까지 꽤나 먼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가능하면 손시연을 생각


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다시, 편의점에 들러서 담배 하나를 샀다. 딱 2대만 피우고 버리자. 다짐하면서.


#16. 손시연


손시연과 명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말에 만나지 못했었는데 오랜만에 시간이 나


다. 서둘러 교통카드를 찍고 지하철에 탄다. 에어컨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사람들이 꽉 찬 지하


철 칸의 공기는 답답하다. 심호흡을 하면서, 나는 지하철 손잡이를 꽉 붙잡는다.


어제 소영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의외로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니, 담담하게 전화를 받기 위


해 노력했다.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준비하고 있던, 대비하고 있던 전화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성민아 안녕..'


'응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전화하려고 했어. 소영아, 우리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나? 아무 때나 괜찮아, 10시 이후만 아니면. 민들레영토 앞 괜찮지? 그래, 그때 보자.'


나는 되도록이면 전화를 빨리 끝내기 위해 노력했다. 오랫동안 전화기를 들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강


소영과 둘이서 만난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서 강소영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에게도 깊은 상처를 내면서,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만 해야 한다. 아마


도 그게 나와, 나와 강소영이 등장하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일 것이다. 나는 좋든 싫든 그 마지막 페이지


에 등장해야만 한다.


나는 피했었다. 책의 줄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지만, 사실 마지막 페이지를 완


성해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더 두렵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말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말이 두려


워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지 못하는 바보 같은 놈이었다.


[나 CGV 앞이에욤 빨리 와요]


하지만 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내가 새롭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감동적


인 소설이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저런 스토리의 영화나 소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강소영과 헤어졌을 때, 앞으로는 강소영을 대하던 마음과 열정으로 다


른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다른 여자를 만날 때 나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 했다.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이 여자 저 여자 소개팅도 해보고 만나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나


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할 줄 알면서도 언제나 이리저리 발버둥 쳤다. 그럴수록 쳇바퀴는 더더욱 빨


리 돌아가 나를 숨 가쁘게 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그렇게 괴로워했다.


손시연은 그런 나에게 다가와 줬다. 쳇바퀴에서 벗어나 편히 숨을 쉴 수 있게 해줬다. 이제 나는 손시연과 끝


나지 않을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가야 한다. 강소영과의 페이지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새


드엔딩일지라도.


[와. 이젠 답장도 안 하죠?ㅡ.ㅡ 사람들이 저 혼자 서있으니까 불쌍하게 쳐다봐요.]


손시연의 문자는 나만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나 혼자가 아니라 손시연과 함께 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답장 대신 역에서 내리자마자 뛰어갔다. 손시연이 있는 곳으로.


'주말에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요즘에 맨날 시간 없다고 하고 답장도 안 하고. 나 정말 삐진 거 알죠?


알아서 해요.'


'약속시간보다 10분은 일찍 왔는데 무슨, 네가 너무 일찍 다니는 거야. 빨리 예매하러 가자. 오늘 공포형


화보는 날인 거 알지?'


'아.... 그랬나?'


손시연이 공포영화라는 말에 움찔한다. 아마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대충 어영부영 넘어가


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랬나는 무슨, 자 때마침 영화관 앞이고. 저녁 먹기 전에 예매는 해야 되고. 물러설 곳이 없네 손시연?


자, 네가 앞장서.'


영화를 예매하려는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따라오던 손시연이 상영표를 유심히 보면서 내 손을 잡아


끈다. 은근슬쩍 다른 영화를 예매하게 할 심산이다.


'와. 가필드 한다. 아저씨. 가필드 알죠? 나 꼬꼬마잖아요. 이거 봐요. 나 이런 거 엄청 좋아함.'


자기 스스로 꼬꼬마라고 하는 거 보니까. 엄청 급하긴 급한가 보구나 너? 그래도 안 돼. 나도 너 백화


점 갈 때 짐 들어줘야 되잖아. 약속한 건 지켜야지.


나는 옆에서 계속 다른게 재밌을 거 같다고 떼를 쓰는 손시연의 말을 무시하고 공포영화를 예매했다.


그제야 손시연도 체념하고 나를 따라온다. 근처에 있는 샤브샤브 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손시연이


학교랑 학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신나서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자기만 너무 많이 말하고 있는


걸 깨달았는지 갑자기 이야기를 멈춘다.


'왜? 계속하지. 엄청 시끄럽고 귀 아파서 좋은데 뭘.'


'아저씨 진짜 웃긴다. 막상 옆에 있으니까 이젠 시끄러워요? 목소리 듣고 싶다고 전화할 때는 언제고.'


응. 네 목소리 듣고 싶었어. 네가 이야기할 때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거야.


'요즘 정말 바쁘나 봐요? 주말에 시간 안된다고 보지도 않고. 나 이제 벌써 개학이에요. 아저씨가 보고


싶다고 해도 자주 못 봐요. 있을 때 잘해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개학할 때가 됐구나. 저번 주말엔 집에 내려가느라고 바빴어. 마음이 안정돼


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서 널 마주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있고... 사실 나, 다음 주에 누구 보기로 한 사람


이 있거든. 걱정하지는 마. 내 마음이나, 결심은 확고하니까. 만나자마자 말해줄 거야. 냉정해 보여도 어


쩔 수 없어. 내가 이제껏 마음속으로만 되뇌던 말들을 다 해버릴 거야.


다만, 걱정되는 건 실제로 둘이서 마주 봤을 때 내 심정이 어떨지는 확신을 못하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


건, 어떻게 쏘아붙이건 사실 중요하지 않아. 나는 정말로 그 애를 좋아했었거든. 그런데 지금 널 보니까


마음이 놓여. 다른 사람 말고, 널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지 않을게. 주저하지 않고 강


소영과의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할 거야.


'또 혼자 딴생각한다. 아저씨 뭔 고민 있죠?'


신기해. 너 여자 맞구나? 그냥 보면 선머슴 같고 푼수에다가 너무 긍정적이라서 걱정스럽기까지 한데 가


만 보면 직감 하난 되게 뛰어난 거 같아. 내 모습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맞춰버리잖아. 아픈지, 고민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밑도 끝도 없이 고민은 무슨, 그런 거 안 키우거든?'


'나 아저씨 성격 잘 알잖아요. 부끄러워서 어떡하나~ 우리 아저씨 나한테 속마음 들켰네?'


'혼자 잘 노네. 그래, 내 성격이 뭔 줄 알고 그렇게 착각하는 건데? 심심한데 너 혼자 노는 거 구경이나


해보자.'


'아저씨 성격요? 음... 무뚝뚝하고 까칠하고, 자존심 엄청 세고, 근데 생각보다 소심하고 혼자 마음속에


담아두고 끙끙 앓고... 또 뭐가 있을까. 아! 좋으면서도 부끄러우면 괜히 안 그런 척 속마음이랑 다르게


행동하고. 또 아~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착한 면도 조금 있고 뭐 이 정도?'


하.. 놀랍도록 정확하구나.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네가 그렇게 정확하게 짚어버리니까 부끄러워진다.


언제 내 성격까지 그렇게 정확하게 파악해버렸니. 그 정도로 가까워졌나 봐. 우리.


'전혀 공감 안 가. 분석해보려면 더 그럴듯하게 해보던가.'


'아저씨. 내 성격은요? 내 성격은 어떤 거 같아요?'


'공격적, 충동적, 본능적, 단순 과격. 더 궁금한 거 있어?'


'에~ 속으로는 정말 착하고 얌전하고 조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또 들켰네? 우리 아저씨? 얼굴 빨게


졌데요~'


'너 오늘 개그콘서트 준비해왔어? 어쩔래? 여기서 빨리 뛰어가면 한 5분 정도는 여유 있을 거 같은데.


준비한 거 또 있으면 더 해보던가. 아니면 쇼 그만두고 그냥 가던가.'


'아저씨 너무 부끄러워한다. 그만해야지.'


오늘따라 나를 못 부끄럽게 해서 안달인 손시연을 데리고 CGV에 갔다. 언제나 그랬듯 팝콘이랑 음료


수는 손시연의 몫이다. 자리에 앉고 조금 지나자 조명이 꺼진다. 그런데 손시연의 모습이 평소와 많이


다르다. 너 되게 긴장했어. 겁에 질린 얼굴로 눈만 똥그랗게 뜨고 팝콘만 계속 먹고 있잖아. 성격 탓인


가. 난 왜 공포영화가 하나도 안 무섭지.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귀신을 봐도, 무서운 장면을 봐도, 무덤


덤 하기만 해. 저걸 왜 무섭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야 그냥 겁먹지 말고 영화 봐. 별로 무서운 영화도 아닌 거 같구만. 아까부터 영화 보는 시간 보다 고개 돌


리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돈 아깝지도 않니.


'꺄악!'


헉. 진짜 하이톤이다. 네 비명. 네 소리가 귀신소리보다 더 커 그리고 왜 이렇게 부담스럽게 달라


붙는 거야? 손 좀 놔봐. 진정하고. 네 자리에 차분하게 앉아서 보지 좀?


'아저씨 진짜 나쁘다. 무섭다는데 왜 뿌리쳐요? 장난 아니고 진짜 무서워서 그러는 거거든요?'


좀 조용히 해. 영화관이 너네 집 안방인 줄 알아? 윽! 또 소리 지르고 달라붙네. 근데 저 장면에서 대


체 왜 소리를 지르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제발 비명을 질러야 될 때 지르란 말이야 왜 귀신 나올 타이밍


이 아닌데도 시도 때도 없이 비명을 질러 대? 네가 먼저 비명 질러대니까 정작 비명 질러야 될 때 사람들


이 김빠져서 가만히 있잖아.


봐봐. 저기 옆에 혼자 영화 보는 아저씨 한 명이 우리 쪽을 계속 째려보고 있어. 다른 사람들도 은근히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고. 넌 사람 많은 곳에서 너무 부끄러워할 줄을 몰라


손시연이 또다시 비명을 지르려고 한다. 더 이상은 안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재빨리 손시연의 어깨를


붙잡고 입을 막아버렸다.


'웩..'


아 더러워 내 손바닥에 네 침 다 묻는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겠어. 더 이상 소리 지르면 민폐야. 네가 지


레 겁먹고 무섭다고 생각해버리니까, 전혀 무섭지 않은 장면에서 깜짝깜짝 놀라는 거라고.


내가 손시연의 입을 막는 걸 보고 옆에 앉은 관객들 몇 명이 큭큭 거린다. 저것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다


고 웃는 거야? 공포영화 무서워서 비명 지르는 거 처음 봐?


'저 아저씨..'


너무 오랫동안 입을 막았나? 손을 떼자 손시연이 불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한다.


'더 이상 못 보겠어요. 그냥 나가면 안 돼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공포영화 싫어하는구나?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네 말대로 가필드나 다른 꼬


꼬마들이 보는 영화 볼 걸 그랬네. 그래 나가자. 보기 싫은 거 억지로 보게 하기는 싫어. 와 고맙게도 한


가운데네, 우리 자리. 안 그래도 대책 없는 네 하이톤 비명 때문에 언짢았던 사람들도 짜증 나겠다.


'미안합니다. 잠깐만 지나갈게요.'


밖으로 나왔는데 손시연이 정말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헉. '하얗게 질린다'라는 표현이 현실


에도 적용되는 말이었구나. 네 얼굴 지금 엄청 창백해. 무슨 아픈 사람같이 핏기가 하나도 없어.


나는 손시연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바닥으로 볼을 비벼줬다. 얼굴이 차갑다.


'야 괜찮아? 물 줄까?'


손시연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물을 하나 뽑아서 뚜껑을 따고 건네줬다. 손시연이 그걸 받아서 마


신다. 조금씩 진정이 되는 모양이다.


'아저씨 정말 나쁜 거 알죠? 누구는 무서워서 소리 지르고 안기는데 매몰차게 뿌리치고 입막기나 하고.'


'더워 죽겠는데 막 달라붙으니까 그렇지. 내가 미안해. 오늘 이후로 공포영화는 절대 보지 말자. 다른


영화라도 볼래?'


'아니요. 아저씨, 우리 그냥 밖에서 걸어요.'


손시연과 나는 그렇게 영화의 반도 체 못 보고 영화관 밖으로 나와 명동 주변을 걸었다. 얘 아직도 공포


영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계속 멍 때리는 표정으로 걷고 있어. 정신 좀 차리지?


그때 골목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우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손시연 위험해! 앞을


보고 가야지.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서 손시연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토바이가 내 왼팔을 스치고 지나간다.


손시연의 구두 한쪽도 벗겨져서 길 한쪽으로 나뒹군다. 나는 오토바이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운전하면 어떡해요! 사람 다칠뻔했잖아요.'


놀란 오토바이 주인이 멈춰 서서 머쓱한 얼굴로 괜찮으냐고 묻는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오토바이를 그냥 보낸다.


'야 너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앞 안 보고 가? 부딪힐뻔했잖아!'


나도 모르게 손시연에게 화를 낸다. 다칠뻔했잖아. 오토바이에 부딪히기라도 했으면 어쩔뻔했어? 생


각도하기 싫어 그런 거.


'미안요. 잠깐 넋 놓고 있었나 봐요. 아저씨 괜찮아요?'


'너 발 안 다쳤어? 잠깐 저기 벤치에 앉았다가 가자'


벤치에 앉고 나서 나는 손시연의 구두를 벗겨서 다친 데는 없는지 살폈다. 자세히 보니 발목 부분이 약간


빨개진 거 같기도 하다. 나는 발목을 잡고 살짝 누르면서 물었다.


'안 아파 여기?'


'괜찮아요. 어? 아저씨, 팔에서 피 난다. 어떡하지?'


피? 아까 오토바이랑 부딪히면서 상처가 난 모양이다. 왼쪽 팔뚝 부분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


다. 손시연이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서 피를 닦아준다.


'내가 할게 이리 줘봐.'


'약국도 다 닫았는데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야 내가 한다니까!'


또다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버렸다. 손시연이 깜짝 놀란다. 난 이런 거 없애야 돼. 기분대로 화내어


리고 언성 높이는 거. 걱정돼서 그러는 애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게 혼자 물티슈로 팔뚝 언


저리를 닦는 나를 쳐다보면서 손시연이 말한다. 


'아저씨 또 그런다. 괜히 걱정되니까 화내는 거죠?'


나는 그런 손시연의 얼굴을 같이 바라본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면서 오른손으로 손시연의 어깨를


감쌌다.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반짝이는 별들도 몇 개 보인다.


너 정말 귀신이다. 네 말이 맞아. 이젠 내가 화내고 나서 혼잔 미안해할 필요도 없네. 이렇게 네가 다 알


아서 이해해주니까 고마워 혼자 미안해하지 않게 해줘서.


'그래. 걱정됐다. 어쩔래? 아까 영화관부터 시작해서 소리 지르고 오토바이에 부딪힐뻔하고 너 걱정돼


서 아주 죽는 줄 알았다. 됐어?'


그 말에 손시연이 웃음을 터뜨린다. 나도 그런 손시연을 보고 따라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도 아까 아저씨 엄청 멋있었어요. 확 끌어당겨서 오토바이도 피할 수 있게 해주고'


네가 그런 립 서비스도 해줄 줄 알고 많이 컸네. 이제 좀 진정이 되는 거 같아. 여기서 계속 앉아있자. 잠


시만 생각 없이 앉아서 쉬자


'아저씨 근데 고민이 뭔데요? 저 다 눈치챘으니까 말해봐요.'


손시연이 내 어깨에 기대면서 묻는다. 그래, 숨길 건 없지. 말할게. 대신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좀 그래


이해해 줄 거지?


'그냥, 예전 친구랑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그랬어.'


'싸웠어요? 나도 친구랑 싸우고 나면 진짜 며칠 내내 불편하던데. 친한 친구일수록 더 그렇다고 먼저


화해하자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죠?'


네 말이 맞아.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해. 그래서 안타까워. 안타까운데, 그걸


쉽게 내색하기가 어려워 상처받을까 봐. 나만 손해 볼까 봐


'그냥 아저씨가 먼저 화해해요. 옛날 일 때문에 계속 고민할 필요 없잖아요?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할 필요는 없어도 확실하게 화해하고 앙금 없이 넘어가요. 그럼 되잖아요?'


와, 내가 너한테 고민 상담까지 다 받네. 고마워 네 말이 맞아. 확실하게 해야지. 언제까지 예전 기억에


붙들려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아저씨 요즘에 담배 피우는 거 다 알거든요? 그것도 좀 끊죠?'


'어, 너 어떻게 알았어? 나 담배 피우는 거.'


'아저씨 옆에 있으면 지금도 담배 냄새 엄청나거든요? 아까 손으로 내 입 막았을 때도 났고. 나한테 어


린애가 담배 피우려고 한다고 막무가내로 라이터 뺏어갈 때는 언제고 왜 담배 피워요?'


담배 피울 일이 있었어.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이 담배 피운다고 라이터 뺏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너


한테 담배 피운다고 혼나고 있네.


'알았어. 지금부터 하나도 안 피울게.'


'자요 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손시연, 우리 지금 되게 붙어있는 거 알아? 얼굴도 가까이 있고 어깨도 감싸고 있고. 분위기 묘해. 처


음 손잡을 때 느낌이랑 비슷해. 네 얼굴에서 향기가 나. 짙지는 않지만 기분 좋은 냄새야. 향수 냄새는


아닌 거 같아.


키스해도 될까? 난 지금 그러고 싶은데. 네가 원할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키스하고 싶어. 네가 거부한


다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괜찮아. 키스를 하든 안 하든 소중하거든 지금 이 순간들이


나는 고개를 돌려서 손시연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손시연이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


지 괜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서 가방을 뒤적거린다.


'어? 내 폰 어디 갔지. 여기 있구나 이 폰 이제 바꿀 때도 됐는데. 하하. 아저씨 명동에서도 별이 다 보이


네요? 아주 선명하게 보이네, 그죠? 저기.. 아저씨 담배 냄새난다. 담배 좀 끊어요.'


횡설수설하기는, 네가 그러니까 나도 어색해지잖아. 에라 모르겠어. 그냥 다가갈게. 그렇게 싫으면 아


까처럼 비명 지르고 뺨이라도 한 대 때리던가.


모르는 척 피하던 손시연도 내가 계속해서 다가가자 찡그리듯이 눈을 감는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키스해본 지도 정말 오랜만이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그냥 무작정 다가가고만 있어.


이해해줘 서툴더라도.


그때 손시연이 가방에서 꺼내놓은 폰이 갑자기 울린다. 벨 소리를 엄청 크게 해놨는지 우리 둘 다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리듬 한 번 정말 경쾌하구나. 정신없는 게 너랑 딱 어울려. 덕분에 겨우 잡아놨던 분위기도 다 깨졌네. 고


맙니다. 휴대폰아.


손시연이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전화다.


'네 지금 밖에서 놀고 있어요. 명동에서요. 빨리 들어갈게요.'


휴... 일어서자 우리. 아버지랑 방금 통화한 여고생한테 키스하고 싶은 마음 따윈 아까 없어져 버렸어.


'진짜 타이밍 한번 좋다. 그지? 우리 너무 오래 앉아있지 않았냐? 일어나자. 아버지한테 전화도 왔는


데 빨리 집에 가야지.'


내가 일어나서 손을 내밀자 손시연이 미소 지으면서 그 손을 잡고 일어난다. 결국에 키스하지는 못 했다.


그래도 괜찮다. 아까 느꼈던 내 느낌은 그대로다. 소중하다. 지금 이 순간들이. 하나 더 약속할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누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더라도 놓지 않을게. 네가 먼저 잡아준 그 손을.


#17. 회상, 2004년 12월 3일


'소영아 너 안 추워?'


'추워... 위에 좀 두꺼운 걸 입고 올 걸 그랬나 봐.'


난 별다른 주저 없이 교복 마이를 벗어서 소영이 어깨에 감싸준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색 교복 셔츠


에 찬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하얗게 소복히 눈이 쌓인 거리, 거기에 새하얀 내 교복 셔츠까지 시야에


들어오자 잠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낀다. 모든 게 새하얗다.


'야 왜 카디건도 안입고 왔으면서 마이까지 벗어줘? 조끼도 안 입고 왔네?'


'나 추위 안 타는 거 몰라? 그냥 벗어 준다고 할 때 입어.'


'싫어 나 안 입을래. 그냥 너 입어. 그러나 감기 걸려.'


소영이는 마이를 벗어서 나에게 주려고 한다. 나는 그런 소영이의 어깨를 꽉 잡는다. 차가운 바람과는


전혀 다른, 소영이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난 감기 걸려본 적 거의 없거든? 춥다면, 난 안 춥단 말이야 그리고 넌 치마 입었잖아.'


'치마 입어도 스타킹 신으면 얼마나 따뜻한데.'


'뻥치시네. 그렇게 얇고 다 비치는 게 뭐가 따뜻하다고 그러냐.'


'네가 몰라서 그래. 정말 따뜻해. 스타킹 벗어줘? 진짜 입어볼래?'


스타킹 신은 최성민의 모습이라... 내가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더 추워진 거 같아. 알았어 스타킹 신


으면 따뜻하다고 치자.


'몰라. 그냥 내 마이 걸치고 있던가 정 싫으면 버리고 가던가 해 그럼.'


그제야 소영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내린다. 난 키가 크지 않지만 어깨는 넓은 편이라. 내 교


복 마이를 걸친 소영이의 모습은 마치 어른 옷을 입은 아이 같다. 헐렁헐렁할 뿐 만 아니라 팔이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해 교복 팔 부분이 팔랑 거린다,


소영아, 방금 내가 안 춥다 그랬나? 안 춥기는 개뿔 무슨 바람이 이렇게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까


카디건이라도 입고 올걸. 미련하기는 그래도 눈 오니까 좋다.


소영이가 교복을 걷어서 오른쪽 손을 나오게 한 다음에 내 손을 잡는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그런데 소


영이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앗. 야 너 손 정말 차가워 지금 얼음 같아.'


소영이는 내 손을 잡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준다. 소영이의 하얀 얼굴이 찬 바람 때문에 약간 불긋하게


상기돼 있다.


'야 괜찮아 괜찮아. 그냥 가자니까.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걱정이 많아?'


내가 손을 놓으려 하자 소영이가 내 손을 다시 잡고서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그것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 나는 소영이 손을 꽉 잡는다. 소영이가 그런 나를 쳐다보면서 묻는다.


'성민아 우리 대학가서도 자주 만나야 되는데. 그치?'


'걱정 마. 대학 가면 시간 남아돈데. 놀 때도 많고.'


'너 서울대나 고려대 붙고 나 이대 붙으면 좋겠다. 그치 그치?'


서울대... 붙으면 좋지. 근데 아마 간당간당 할 거 같아. 내 점수. 김창수처럼 수석일까 차석일까 하는 수


준이 아니라고. 너도 간당간당 하잖아. 이화여대 가는 거, 우리 이러다가 둘 다 재수하는 거 아닐까? 후후


농담이야 농담.


소영이가 갑자기 앞으로 폴짝 뛰어가서 나를 마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성민아.. 너 아까처럼 네 마음대로 내 손 놓거나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근데 너 손 되게 따뜻하다. 무슨 난로도 아니고, 화상 입겠다.'


'그냥 화상 입어. 내가 손 놔주면 그때 손 빼. 먼저 손놓는 사람이 손바닥 맞기다?'


손 놓지 말라는 소영이의 말, 무슨 의미였을까? 되돌아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난 그냥 소영이 말


대로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언제 그 손을 놓고서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18. 강소영


'성민아, 여기.'


민들레 영토 앞에 소영이가 서있다. 분명히 강소영이 맞는데 뭔가 많이 달라진 느낌이다. 가까이 다가


가기 힘들다. 어깨에 손을 가져가기도 힘들다. 손을 잡는 건 더더욱 상상할 수 없다. 강소영은 예전처럼


내 앞에 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심리적인 장벽은 서로를 밀어내려고 안달이다. 시간은 다시금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나는 그걸 새삼 다시 깨닫는다.


'우리 그냥 여기 들어가자. 괜찮지?'


소영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민들레 영토로 들어가는 것조차도 어색하다. 소영이를 먼저 들어가게 해


줘야 하는데 어떡하지? 손을 잡고 들어가기도 뭐하고 어깨를 감싸서 들어가기도 뭐 하다. 그냥 어색


하게 거리를 두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단지 커피숍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작


은 부분마저도 어색해졌어. 우리


이렇게 된 거, 누굴 탓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시간을 탓해야 하는 거니. 조금 슬프다. 이런 느낌, 우리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자리에 앉았는데도 막상 할 말이 없다. 이럴 때 나 라도 분위기 풀어주고 말 좀 건네고 해야 하는데, 무


뚝뚝하기만 한 놈이 그럴 리 만무하다. 어색하게 휴대폰이나 계속 확인하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


고 있는데 소영이가 먼저 말을 꺼낸다.


'너 예전이랑 그대로인 거 같아. 잘 지냈지?'


'잘 지냈냐'라는 말, 너와 헤어진 이후 어떻게 지냈냐는 의미겠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애매해. 한마


디로 잘라서 말하기가 힘들어. 손시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솔직히 힘들었지. 괴롭기도 했고. 근데 지금


은 행복해. 공허감도 많이 없어졌고. 네 생각도 많이 지울 수 있었어.


'그냥 뭐... 잘 지냈지. 너 이대 근처에서 하숙하는 거야?


'응. 너도 주변에서 하숙하지? 근데 신촌에서는 한 번도 못 봤네,,,'


마침 주문했던 차와 음료가 나온다. 나는 그걸 핑계삼아 다시금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있다. 아. 녹차


라떼. 소영이 너 녹차라떼 정말 좋아했었지. 뭐 먹을 때 맨날 그것만 먹어서 내가 슈렉이라고 놀렸잖아.


다 지난 일이네. 내가 널 놀리던 일도, 교복 입고 녹차라떼 먹던 일도. 정말 오래 전인 거 같이 느껴져.


'저기... 성민아...'


왜 이렇게 두려울까.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네가 하는 말인데. 예전 같으면 가슴이 떨리고 설렜어야


하는데. 지금은 무슨 말할지 걱정돼. 그래도 난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들어야 해. 너와 확실하게 하려고


여기 온 거란 말이야. 말해 소영아. 그렇게 주저하지 말고.


'왜? 할 말 있으면 해도 돼.'


'응... 근데 지금 되게 어색하다 그치? 우리 원래 안 이랬는데.'


소영이가 미소 지으면서 말한다. 이렇게 소영이 눈을 쳐다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더 예뻐졌네. 너 소개


팅이나 미팅할 때 인기짱이 있겠다.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어. 오늘 너를 완전히 잊을 거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울 거야.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순간이 널 마지막으로 보는 날일 거야. 우연히 마주치는 일 조


차 없을 거야. 그러니까...


'모르겠어. 나, 여자가 이런 생각하는 게.. 이런 말하는 게 부끄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소영이의 얼굴. 울지 마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어 소영아. 그냥 말해. 처음엔


네가 정말 야속했었어. 실망스러웠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난 너를 미워하지 않아. 그냥 당당


하게 말해주면 안 돼? 내가 마음 아프잖아.


'나, 지나간 일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한다면... 그냥 그렇게 생각해도... 받아들일 게. 뭐냐면


나는... 부끄러운 거 상관없이 내 진심을 말하는 거니까.'


소영이는 마음이 여린 여자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너무 어렵게 꺼낸다. 말할 때마다 소영이 가슴에 생


채기가 나는 느낌이다. 그게 내 눈에 선하게 보인다. 그게 나를 더 괴롭게 한다.


'혼란스러웠어. 그냥 너랑 1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내가 공부하는 너한테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네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건지.. 나는 너를 정말 좋아했는데. 너는 별로 고민한 흔적도 없이 냉


정하게 재수해 버리겠다고 하니까..'


'소영아.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을게. 나도 괴로웠어.'


정말이야. 나 괴로웠어. 솔직히 소영이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했는 줄 몰랐어. 그건 내 실수야. 그래


도 내가 괴로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왜 재수했냐고? 말로 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거야. 아마. 왜


친한 친구 사이인 창수랑 나 사이에 그런 전선이 형성돼 있었는지, 대체 왜 형태를 알 수 없는 경쟁의


식 때문에 전의를 불태웠어야 했었는지.


'헤어지자고... 말하면서도 난 네가 잡아주기를 바랐는데. 넌.. 그냥 흔들림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잖


아.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잖아. 난 그날 이후로 너무 아쉬웠는데, 네 생각 때문에 잠도 못 잤는데


힘들었어. 계속 힘들었어. 지금도..'


난 그냥 잠자코 소영이의 말을 들었다. 겨우겨우 힘들게 말하고 있는데 별 의미 없는 대답이나 피드백


으로 끼어들기가 싫다. 소영이는 지금 높은 탑을 힘들게 쌓아 올리고 있는 사람 같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파편들을 겨우겨우 찾아내서, 자기 손에 피가 나는 지 알면서도 탑을 쌒아 올리는 사람. 조금이라


도 잘못되면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소영이를 도와줄 수가 없다.


'대학 가서 너 잊어 보려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했는데... 난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 했던 거 같아. 난 항


상 그대로였어. 그런데 그대로일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너한테 연락할 용기도 안 나고, 가까이 살고 있


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영아. 왜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그런 말은 서로에게 상처야.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건데?


너는 물론이고 나도 상처가 나버렸어 지금. 그 말은 안 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너한테 너무 미안해지잖


아. 화가 나. 너한테도 화가 나고, 그보다 나 자신에게 더더욱 화가 나.


'소영아. 고작 그런 말하려고 온 거야? 이기적이라는 생각 안 들어?'


나란 놈은 또다시 제 기분을 주체 못 하고 소리부터 질러버린다. 항상 자제하려고 해도 이 모양이다.


'응... 나 이기적이야.. 그치? 나 정말 이상한 애 같아. 내가 생각해도 그래.'


소영이가 운다. 언성 높여서 미안. 내가 심했어. 사과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성민아 바보같이 울어서 미안해. 근데 화내지 마. 속으로 바보 같다고 욕해줘. 응?'


미치겠다. 가슴이 터질 거 같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버리고 싶다. 안돼. 그러면 힘들게 너를 보


러 온 의미가 없어져. 여기 남아서 뭘 해야 할까? 너한테 상처 주는 말 되풀이하면서 이제 그만 보자고


쏘아붙일까? 난 이랬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한테 오늘 이후로 끝내자고 냉정하게 말해버리고, 너는


최성민 이 나쁜 자식, 개자식 한바탕 욕을 해버리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밤새워 기도했었는데. 결국 이


렇게 돼 버리고 말았네. 너는 울고 나는 마음 아파하고.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소영이의 눈물이 조금씩 잦아든다. 소영이가 다시금 입을 연다. 슬로 모


션처럼 소영이의 모습이 내 눈앞에서 천천히 흘러간다. 소영이의 손, 입, 얼굴, 어깨 천천히 움직인다.


소영이가 무언가 이야기한다.


'솔직하게 말할게. 성민아. 우리 다시 시작해볼래? 너만 괜찮다면 나 그러고 싶어. 예전처럼 너랑 함


께 하면서 대학 다니고 싶어. 우리 좋았잖아. 고등학교 때 너랑 사귀면서 행복했거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왜 하필 지금... 예전에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자존심 다 버리고 너를 붙잡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손시연이랑 만나기 전에 너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또 달라졌을까? 어찌 됐든 현실은 바


로 지금 이 순간인데. 그렇다면 내 대답도 하나야. 그럴 수 없어 소영아.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대답이야.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그 말하려고 나왔어 오늘. 나 그만 일어날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영이가 내 손을 잡는다. 나는 그런 소영이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 없다.


슬프다. 병신같이 아주 조금 눈물이 난다. 이런 모습, 별로 안 좋은데. 소영이한테 눈물을 보여주기는


싫다. 마음이 아프다. 나는 소영이를 끌어안아 버렸다. 눈물을 감추고 싶기도 했고 소영이와의 지난


일이 생각나기도 했다. 네 진심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어... 너무 늦었어 소영아. 우리 그만 끝내자. 난


이제 이렇게 너를 꼭 안아줄 수 없어. 나 다른 여자랑 다시 시작했어. 그리고 난 그녀에서 상처를 줄


수 없어. 내 상처를 씻어준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어. 네가 원망해도, 난 그녀만 보면서 살 거야.


그녀만 사랑할 거야. 이제... 너는 아니야. 미안해.


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소영이한테 건넨다. 겨울에 쓰는 장갑이다. 남자 장갑 답지 않게 하트 모


양이 있고 그 양옆에 강소영과 나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소영이가 나에게 줬던 선물이다. 손이 너무


차갑다고, 다시는 바보같이 남자다운 척 옷 벗어줘서 감기 걸리지 말라고.


장갑을 건네준 의미가 무엇인지 소영이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나는 소영이를 남겨두고 그


렇게 나와 버렸다. 아직은 겨울이 아니다. 그때처럼 바람이 차갑지는 않다.


#19. 뒷모습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오랜만에 봤는데 안 반가웠어요?'


'아니야, 반가웠어.'


'진짜 안 반갑다는 표정인 거 알아요? 요즘 아저씨 진짜 재미없다. 말도 없고, 놀려도 반응도 없고.'


'응...?'


'봐요. 또 딴 생각하고 있잖아요. 아까부터 내내.'


'미안 미안. 뭐라고 했지?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줘.'


'됐거든요? 메롱. 재방송 안 해요. 저 들어갈게요. 다음에 볼 때도 또 그러면 혼날 줄 알아요. 안녕.'


'응, 잘 가. 학교 늦게 끝나면 연락하고 바래다줄게.'


손 시련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시연아 한 번만 뒤돌아봐주면 안 돼? 네 얼굴이 다시 보고 싶어. 그렇게


뒤돌아서서 걸으니까 왠지 모르게 불안해. 항상 네가 나한테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은 내가


너한테 의지하고 있었나 봐. 지금에야 알았어.


내가 원래 이런 놈이었을까.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라고, 손시연과의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도 이


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다. 아직 겨울이 되지 않았는데, 너무 춥다. 내 몸속에 계


속해서 알 수 없는 느낌의 한기가 흐른다.


개강 후에도 나는 손시연과 가능한 많이 만나려고 노력했다. 항상 그 애를 먼저 챙겨주고 신경 써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마치 가시 박힌 잔상처럼 강소영이 생각났다.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괴로워했다. 내가 손시연을 사랑하기는 하냐고?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힘들기만 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너를 사랑할 자격이나 있기는 한 걸까.


그래. 남자라면 누구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있는 거잖아. 거기서 일정 부분 자유로울 수 없


는 거고.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아저씨들까지 누구나 한 번씩 해보는 이기적인 자기합리화다. 나


역시 그 정도 밖에 안되는 놈인 걸까?


휴대폰이 울린다. 김창수다. 무슨 일일까. 목소리가 좋지 않다. 그래 창수야. 신촌 거기서 만나자. 너


밥은 먹었냐? 알았어. 나 3~40분 정도면 도착해. 응 얼추 비슷하게 도착하겠네. 이따 보자.


지금 내 상태로는 창수랑 만나서 무슨 얘길 해야 될지 모르겠네 예감이 안 좋다. 창수는 분명 나를 만나


서 무언가를 확실히 해버리고 싶은 것 같다. 소영이 때문일 거다.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모르겠다. 대체 누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된 걸까. 별다른 문제가 없었


더라면, 평탄하게 시간이 흘러갔었더라면 김창수는 김창수대로 대학 잘 가고 괜찮은 여자도 사귀며 행


복했을 텐데. 나랑 소영이도 늘 그렇게 사랑하면서 여기까지 왔을 테고.


임원회의 때 나와 김창수가 똑같이 소영이에게 반해버린 게 어긋남의 시작이었을까? 나와 김창수가 서


로 원치 않았던 라이벌이 됐을 때부터 문제가 시작됐을까. 결과적으로 지금 세 사람 모두 너무나 힘들


어하고 있다. 세 사람 모두 행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프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신촌에서 만난 창수도 나도, 의외로 덤덤한 표정이다. 너랑 나, 정말 친한 친구기는 한가보다. 말 안 해


도다 알 거 같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랑 왜 만나야 했던 건지. 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


는 건지. 그런데 나는 해답을 줄 수가 없어. 나도 잘 모르겠거든. 너나 나나 척척 풀어내서 선생님 들한


테 칭찬받았던 어려운 수학 문제랑은 차원이 달라. 공식도 없고 해답도 없어.


'성민아. 한 가지만 물어보자.'


'.....'


'너 소영이랑 만났다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야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소영이가 앞으로 만나지 말자네. 미안하데. 그동안 자기감정을 너무 속여온 것 같데.'


결국은 그렇게 된 거야? 난 차라리 너희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네가 미워지든


강소영이 미워지든 내 기억의 잔상들을 부서져버리게 만들고 싶었는데...


'근데 왜 날 찾아온 건데? 나? 소영이 만나서 말했어. 이제 모르는 사람하자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한 건데.'


'소영이 앞에서 한 말 말고! 지금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야. 네가 소영이 바라봤던 눈빛, 표정, 그리고


소영이가 떠난 다음에 들었던 생각, 대체 어떤 거였어. 어떤 거였길래 너도 그렇고 소영이도 그렇고 똑


같은 느낌으로 날 대하는 거냐고!'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돼? 강소영? 사랑했지. 사랑했어. 지금도 솔직히 완전히 잊지는 못하겠어.


첫사랑이라서 그럴까? 너무 좋아해서 그랬을까? 몰라. 모른다고.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지금 따


로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거야.'


'우스워 너. 참기 힘들 만큼.'


'그래 이 자식아. 내가 생각해도 나, 정말 병신 같고 우스워. 근데 김창수, 넌 뭐가 다른데? 솔직해져봐


너한테 소영이가 뭔데? 모든 걸 다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네가 가져야 하는 소유물 중에 하나, 뭐 그


는 거야?'


'말 함부로 하지 마.'


'짜증 나? 언제나 2인자라고 생각했던 놈 때문에, 좋아하는 여자 마음이 돌아섰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는 거냐고. 항상 갖고 싶은 거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천재라서? 그런 말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라


면 그만 돌아가. 네가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으니까.'


김창수가 내 멱살을 잡는다. 김창수도 나도 원래 이런 놈들이 아닌데. 둘 다 너무 흥분해 있다. 나는 이


상황이 싫다. 김창수가 이래야 하는 것도 싫고, 내가 이런 모습 보여야 하는 것도 싫다.


'놔. 이거 동네 양아치들이 여자 가지고 싸우는 모습 같아서. 불쾌해.'


창수가 잠시 동안 숨을 내쉬면서 나를 노려보다가 손을 내려놓는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건지도 몰라. 예전부터 나, 내가 갖고 싶은 거 남한테 뺏기기 싫어서 정말 처절한


게 노력했어. 공부? 뭣도 모르는 녀석들이 나보고 천재라고 치켜세워 줄 때마다 속으로 얼마나 불편


했는데. 내색은 안 해도 너같이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한테 따라잡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


는지 알아? 알 턱이 없지. 너희들 앞에서 난 만능이고 천재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연기자 같았으니까.


고등학교 내내 공부 스트레스로 약까지 먹으면서 매일 밤 잠도 거의 못 자면서 공부했어. 소영이도 마


찬 자기야. 좋아하는 마음이 4년도 넘게 계속됐어. 강소영을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서 잠도 못 잤어.


그런데 너 때문에 내 마음을 눌러야 했어. 좋아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도 쿨한 척, 무심한 척


천재인 양 행동해야 했어. 네가 뭘 알아. 뭘 알아서 그런 말 내뱉는 거야.'


김창수가 이러는 거, 태어나서 처음 본다. 내 마음속에서 너는 언제나 완벽하고 냉정한 라이벌이 이었


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따라잡고 싶었던 천재 같은 라이벌 솔직히


나는 내 감정에만 충실했지. 김창수라는 녀석의 생각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항상


1등만 하고 가지고 싶은 건 모두 다 가질 것처럼 보였던 네가 어떤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소영이는 너 때문에 이러고 있어. 너를 못 잊어서 나랑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거야. 그렇게만 알아둬.


나는... 나는 더 이상 소영이 포기 못 해. 네가 나랑 소영이 사이에 간접적으로 끼어드는 것조차도 용


납 못하겠어.'


나를 만난다고 해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건. 나보다 김창수가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창수는 그


렇게 되돌아갔다. 이제 녀석과 나는 라이벌이 될 수 없다. 라이벌로서 감춰야 할 비밀까지 다 드러내버


린 김창수가 되돌아간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둘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었다.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안


을 것처럼 내 가슴속에서 지속되던 감정이었는데. 애초부터 이렇게 너에게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


을까. 아니다. 자유롭기보다는 공허하다. 허탈하다.


또다시 강소영 생각이 난다. 소영이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냥 창수랑 다시 시작하면 안 되는 거니?


너는 창수랑 다시 시작하고, 나는 손시연과 다시 시작하고. 그런 해피엔딩을 기대하기는 무리인 걸까?


네가 지금 이러니까 나 역시 손시연과 마음 편하게 사귈 수 없잖아. 너한테 미안해. 너는 이렇게 마음


아파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를 사귄다는 게.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나.


병신 같은 모습만 보이고 있으니까. 바보 같은 생각으로 힘들어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손시연에 이게 미안해. 그 애 하나만을 사랑해줘야 하는데. 그 애 하나만을 신경 써줘야


하는데. 손시연은 나에게 다시금 사랑을 일깨워줬어. 내가 다시 설레고 즐거울 수 있게 해줬고.


손시연에게는 첫사랑 운운하면서 강소영을 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더라도 더러운 변명


처럼 들릴 거야. 손시연은 그럴 자격이 있어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일 자


격이 없어. 난 그럴 자격이 없는 놈이야. 그런데 이러고 있어. 지금


어떤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띄엄띄엄 희미하게 들리다가 점차 규칙적이고 또렷하게 변해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눈을 뜬다. 누군가 하숙집 방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지? 민석인가? 부스스 해진 머


리를 손으로 툭툭 털며 나는 방문을 연다. 손시연은 또다시 의외의 시점에 나에게 다가왔다. 되돌아


보면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저씨~뭐 해요.'


'어...?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여기 왜 이렇게 허술해요? 대문도 다 열려있고, 아저씨 방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친절하게 다 알려 주


던데요? 반갑죠? 반갑죠?'


'너 학교는 어떻게 하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연락하면 받으려고 휴대폰 꺼놓은 거예요? 자습 땡 까고 왔는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오늘 우리 담임선


생님이 감독하는 날 아니니깐.'


보고 싶었어. 어젯밤 내내. 근데 지금은 너랑 마주 보고 있을 자신도, 여유도 없네. 그냥 돌아가 주면 안


될까? 내가 좀 정신 좀 차린 후에, 나중에 다시 만나면 안 돼?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지금 이 상태


로는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윽... 방에서 남자 냄새 쩐다 진짜. 혼자 사는 불쌍한 남자 티 다 내고 아니네. 그리고 담배 또 폈죠? 왜


나랑 한 약속 안 지켜요?'


손시연이 창문을 활짝 연다.


정말 안 어울린다. 아프고 우울한 내 마음과, 밝고 쾌활하기만 한 네 모습. 네 명랑한 톤의 목소리가 내


머리에서 맴돌면서 나를 정신없게 해. 좀 씻어야겠어. 이렇게 자다 일어난 얼굴로 멍하니 앉아있으니


까 더욱 괴리감이 느껴져. 너랑 나 사이에.


'나 좀 씻을게. 잠깐만 여기 있어.'


'아저씨 저기 밖에 주방 써도 되는 거죠? 이따가 밥해줄까요? 나 김치찌개 진짜 잘하는데. 씻고 와요.'


연거푸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나는 무언가를 털어버리기라도 하듯이 계


속해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방으로 돌아갔는데, 손시연이 내 폰을 들고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뭘 보고 있는 거니. 시연아 충격받아


은 듯한 얼굴이잖아. 가슴이 철렁한다. 강소영이랑 김창수에게 왔던 문자, 아직 지우지 않았는데.


안 돼 보지 마. 시연아. 나만 마음 아프고 끝내고 싶어. 너까지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야 손시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남의 휴대폰을 봐!'


내가 매우 흥분한 얼굴로 손 시련의 손에서 폰을 빼앗아 버린다. 손에 연이 그런 나를 깜짝 놀라서 쳐다


본다.


'미안해요 아저씨.... 전 그냥 휴대폰 충전하려다가...'


'너 오늘 왜 온 거야? 돌아가. 나 지금 너랑 마주하고 있기 힘들어. 그러니까 돌아가 제발.'


손시연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된다. 난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또다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 알


면서도 이러고 있다. 손에 연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다른 형태의 상처를 주


고 있다.


'아저씨..'


'왜? 울상 짓고 그런 연약한 표정 지으면 또 넘어가 줄 줄 알았어? 네가 애야?'


'내가 아저씨 휴대폰 보면 안 돼요? 왜요? 뭐 보여주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요? 난 아저씨한테 내 휴


대폰 다 보여줄 수 있는데 아저씨는 왜 못 보여줘요?'


휴대폰에 온 문자들을 봤음에 틀림없다. 아무리 쾌활한 척하고 밝은 척해도 손시연은 가슴에 작은


슬픔 하나 가지고 있는 마음 약한 여고생일 뿐이다. 여자일 뿐이다. 손시연이 운다. 나쁜 놈인 내가


숨도 쉬지 못하게 몰아세우자 손시연은 하숙집 앞에서 만났던 그날 이후, 처음으로 울고 있다.


'아저씨 이제 나 안 좋아해요? 다른 여자 좋아해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나도 지금 어떤 상황인 건


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흑.. 왜 화내요? 나한테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안 돼


요? 나 바보같이 아저씨 말 곧이곧대로 잘 믿잖아요. 그냥 변명이라도 해주면 안 돼요? 왜 무섭게 화


부터 내요.. 아저씨.. 맨날 그러잖아요. 화부터 내고, 무뚝뚝하게 행동하고, 그런 아저씨 보면서 내가


항상 생각 없이 웃기만 한 줄 알아요? 맨날 웃기만 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나도.. 흑흑'


손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내 방에서 나가 버린다.


미안해. 울지 마 그렇게 가버리지 마. 나는.... 나는 네가 너무 좋단 말이야. 너무 사랑한단 말이야. 소영


이부터 창수까지, 최근에 만나면서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아 버렸어. 감정의 제한선 없이 폭발해버렸


어. 너랑 나 사이의 감정도 이렇게 폭발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어. 너까지 이렇게 뒷모습을 보여 주


면 나는 어떡하라는 거야.


그렇게 되뇌면서도 나는 손시연을 잡을 수가 없다. 뒤따라가 멈춰세우고 끌어안아 줄 수도 없다.


얼마 전 강소영과 김창수, 나 이렇게 셋은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손시


연은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손시연은 내 뒷모습을 바라볼 수 없지만, 사실 내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20. 회상. 2006년 어느 날


나는 꿈을 꾼다.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회상이다. 과거에 있었던 일. 그래서 꿈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


울리는 일. 그 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손시연이다. 그녀와 나는 신촌에 있는 마노라는 카페에 앉아 있


다. 분명히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인데. 나는 제삼자가 되어 어색하게 그들을 바라본다. 손시연은 셰이크


에 꽂은 빨대를 물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아저씨 나 대학 가면 진짜 재밌겠죠? 우리 지금보다 더 재미있게 사귈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요?'


2008년이면 너도 대학생이네. 재밌겠다. 정말 그런데 나 그때쯤엔 군대에 가있지 않을까? 꼭 군대가


아니 더라도 이런저런 일로 되게 바쁠 거 같은데.


'재밌겠지. 근데 나 아마 너 대학가는 해나 그다음 해에 군대 갈걸?'


'아.. 군인 아저씨 되는구나. 몇 년 동안 가는 건데요? 나 그럼 대학 가자마자 아저씨도 없이 혼자 대학


다녀야 함?'


'군 생활은 2년이야. 정 아쉬우면 네가 대신 가 주던가. 여자친구가 대신 가주면 난 안 가도 돼.'


'어.. 진짜요?'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걸 믿니. 근데 너 나 대신 군대 가주기는 정말 싶은가 보다? 네 얼굴에 그렇게 써


있어. 하기야 당연하지. 다른 사람 대신해서 군대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


'에이. 그냥 아저씨가 군인하고 와요.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나라를 지키겠어요. 까짓것 2년 기다려 줄


게요. 근데 아저씨 군대 갔다 오면 더 삭아서 돌아오겠네? 우리 아저씨 정말 불쌍하다. 안 그래도 쩔게


생겨서 걱정인 마당에.'


말이라도 고맙다. 몇 년이 지나도 이렇게 사귈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연인이었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


겠지 우리? 너 대학 가고, 나 군대 가고 시간이 흐르더라도 계속 사랑할 수 있겠지?


'아저씨, 있잖아요. 그때 나 청송대에서 무슨 소원 빌었게요?'


아. 내가 너한테 청송대에서 소원 빌면 이뤄진다고 낚시한 그날? 너 되게 진지하게 눈 감고 소원 빌었


잖아. 내가 얼마나 미안했었는데. 네가 내 말을 너무 쉽게 믿어버려서.


'보나 마나 평생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게 해주세요. 뭐 이런 거겠지.'


'웅.... 아저씨는 그저 내가 먹을 거나 밝히고 그런 애로 보이죠? 됐어요.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안 가르쳐


줄래요.'


그렇게 귀여운 말투 좀 쓰지 마. 정든 다니까.


'그러시든지. 관심 없거든?'


갑자기 눈앞의 영상이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나는 눈을 뜬다. 아직 새벽이다. 주변이 조용하다. 창밖


에는 술집 네온사인이 깜빡이고 있다. 네가 빌었던 소원 뭐였을지 정말 궁금했는데. 나중에라도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나는 눈을 감는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21. 너였다는 걸


내 일상은 손시연을 만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평범한 연세대 학생으로서의 하루는 특별할게 없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서 수업을 듣고 다시 그 문을 나선다. 혹시 아는 친구들이라도 만나면 짧게 인사


를 나눈다.


하숙집 대문을 열 때마다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다. 손시연이 처음 만나던 그날처럼 여기 서 있


지는 않을까? 네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고 해도, 이제는 라이터를 뺏어가지 않을 텐데. 너를 혼자


남겨두고 하숙집 문을 닫으며 들어가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없다. 손시연이 담배를 피우려고 했던 하숙집 앞에서 나는 그녀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인


다. 바보 같은 짓이다. 담배연기 따위에 예전 기억들을 실어 흩날릴 수는 없다.


시간은 그렇게 계속 흘러갔다. 붙잡고 싶다고 잡아둘 수도 없었다. 되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김창수와 강소영을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손시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을 멈추


고 싶어서 컴퓨터를 끄적이고 TV를 보다가도 또다시 손시연을 생각하는 이상한 상태가 반복되고 있


었다. 너에게 난 무슨 의미였을까. 나에게 넌 무슨 의미였고. 어느새 주변이 춥다. 눈이라도 올 것만


같다.


하숙집 방에서 울며 나간 이후로 나는 손시연을 볼 수 없었다. 나도 연락을 하지 못했고, 손시연도 나


에게 연락을 하지 못 했다. 그냥 헛된 자존심일까?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먼저 찾아가지 못하는 걸


까. 강소영을 사랑했었기 때문일까? 네게 미안하기 때문일까.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밤늦게 학교 끝나면 데려다주는 사람은 있을까? 어두운 지름길로 가지 않


고, 내가 당부한 대로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 길가로 걸어가고 있을까.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


는지, 걱정하던 수학 과목은, 사이가 안 좋아서 걱정하던 친구랑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 궁


금해서 미칠 것 같아. 지금이라도 집 앞으로 가서 널 기다리고 싶어. 그런데 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


어. 단지 쪽팔리고 어색해서가 아니야. 자존심 때문이 아니야. 나는...


주변에서 분주하게 일어서는 학생들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내가 교실 안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구나.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학교를 다니는 걸까. 나도 서둘러 가방을 챙기는데, 같은 수업을 듣는 반


동생이 나에게 다가온다.


'성민 오빠! 지금 여자친구 안 사귀지? 소개팅할래?'


소개팅? 다른 여자랑?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질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


는 손시연과 사랑하고 나서 강소영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한


다면, 손시연을 잊을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질 수 없는 것 같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도 사실 잊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노래를 부른 것이리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지 않았기 때문에.


'요즘 바빠서 소개팅하기가 좀 그러네. 다른 애들 많잖아. 혁주도 있고 민권이도 있고. 걔네한테 소개


시켜주지그래?'


'난 오빠랑 어울릴 거 같아서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아쉽다. 알았어. 오빠. 맘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


나는 위당관에서 나와 연희관을 거쳐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 청송대가 보인다. 내가 손시연과 처음 손


을 잡고 걸었던 그곳. 손시연이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던 그곳. 나도 괜히 눈을 감고 소원을 빌고 싶


어진다.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손시연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다시금 눈


을 떴을 때 내 눈앞에 그녀는 없다. 내가 거짓말로 만들어낸 미신이 통할 리가 없다.


미안해. 나 조금은 알 거 같아. 네가 그때 무슨 소원을 빌었었는지. 그래서 나 자신이 더 원망스러워.


[독수리 약국 앞이다. 안 나오고 뭐 해?]


민석이 문자다. 그러고 보니 오늘 수업 마치고 보기로 했었지.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 너라도 만나서


기분 좀 풀고 싶어. 넌 내가 힘들 때 마나 가끔씩 해결책을 제시해주곤 했잖아.


'이 자식 왜 이렇게 늦었어? 너 요즘 약속시간마다 늦는 거 알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민석아. 그런데 나 손시연이랑 만날 때도 매번 늦기만 했어. 기다리는 쪽은 항


상 시연이었어. 그리고 바보 같은 나는 그걸 지금에야 깨닫고 있어. 항상 기다려 줬는데. 늘 기다리


면서도 왜 이렇게 늦냐고 짜증 한 번 낸 적이 없었는데.


'출출하지 않냐? 우선 저기서 간단하게 김밥 같은 거라도 먹자. 늦었으니까 네가 사.'


분식집에 들어간다. 밖이 제법 쌀쌀해서 그런지 안경에 김이 서린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석이가 내게


묻는다.


'너 그 귀여운 여고생하고는 잘 돼 가냐? 걔 지금 학교 다닐 거 아니야. 자주 만나고 해?'


'어? 그냥 뭐 그렇지... 너는 어때? 그 몸매 좋은 후배랑은 잘 사귀고 있어?'


'응. 이 형님이 또 여자 하나는 잘 사로잡지 않느냐. 요즘에 내 말 진짜 잘 듣는다니까?'


여자친구 한마디에 벌벌 떠는 놈이 무슨.... 김밥이랑 라볶이 나왔다. 먹자. 요즘에 밥도 제대로 못 먹었더니


배고프다.


나는 라볶이를 조금 덜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제길... 너무 똑같다. 손시연의 학교 앞에서 먹었던 라


볶이 맛이랑. 넌 괜스레 거리감을 두고 어색해하는 나에게 그렇게 손을 내밀어 줬는데. 뜨거운 라


볶이가 목에 닿자 기침이 나면서 반사적으로 눈물이 조금 난다. 그런데 그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계속해서 흘러내린다. 주체할 수가 없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을까. 


어깨를 들썩이고 흐느끼면서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 스스로가 이런 내 모습에 깜짝 놀라버린다.


이제 확실해졌어. 내 가슴이 말해주고 있어. 지금은 소영이가 아니라는걸. 나는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아파하고 있었다는걸. 그래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걸.


'흑.... 흑흑..'


분식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민석이도 그런 나를


보고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차분하고 냉정하게만 보였던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니까, 죽마고우인 그 녀석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야 최성민. 너 미쳤어? 갑자기 왜 이래? 왜 울고 난리야?'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나를 사랑해준 사람 때문에. 눈물이 안 멈춘다. 쪽팔려도 참아 구민석. 나도 쪽


팔려. 나도 쪽팔리다고. 남들 앞에서 이렇게 울어본 적 없단 말이야. 뭐 대단한 장소에서도 아니고, 이


렇게 분식집에서 씨발..흑


나 원래 욕 같은 것도 안 하는데. 손시연이 라이터 돌려달라고 울면서. '씨발' 이라고 했을 때 얼마나 한심


스러웠는데. 미안해 소영아 나 이제 너보다 손시연을 훨씬 사랑하나 봐. 너는 나를 못 잊었어도. 나는


너를 이렇게 조금씩 잊어가는 건가 봐... 미안해 손시연. 사랑하면서도, 너한테 상처 주기만 하는 나쁜


놈이어서. 항상 웃고 밝은 모습만 보여줬던 네가, 얼마나 상처받고 아파했는지 알아 주지 못 해서


'평생 운 적도 없는 놈이 왜 이래 이거? 뭐야. 무슨 일인데? 말해봐 인마 무슨 일이냐고.'


'흑.. 이 집 라볶이 너무 맛있어서 그런다 왜.'


나는 황당해하는 민석이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렇게 울어버렸다.


#22. 회상, 2008년 10월 20일


시간은, 또다시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나는 그것을 예상했으면서도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아


직까지 연대생이지만, 너는 이제 여고생이 아니다. 너와의 사랑. 나는 시간이라는 계단을 거슬러 우리


가 해후했던 그날을 다시금 추억한다. 흘러가는 시간은 조금씩 살갗을 파고들어 나를 아프게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23. 첫눈.


첫눈이다. 나는 하숙집 창문을 열고 그걸 바라본다. 펑펑 쏟아지지는 않지만 진눈깨비가 서울 거리에


소복이 내려앉는다. 술집으로 뒤덮인 신촌이지만. 그날만큼은 순백하다. 깨끗하다. 사람들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신촌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손시연의 하늘에서도 흰 눈이 내릴까. 그녀도 나와 같은 세


상을 보고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는 게 확실해진 지금.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잠깐, 생각나버렸어. 너와의 약속 넌 그


약속을 지키려고 정말 싫어하는 공포영화까지 같이 봐줬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도 끝까지 약속


을 지켜 줬었는데 나는 오래 뒤에 일이라 치부해버리고 잊고 있었어.


네 생일날 학교 찾아와서 선물 주기.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그래서 눈이 내리나봐 미안해 손시연.


나 이렇게 해야만 할 거 같아. 아니해야만 해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어. 나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다. 여기서 주저해버리면 평생 일어나지 못하고 주


저 앉아서 괴로워할 것 같다. 나는 어디론가 향한다. 흰 눈이 내 머리와 옷에 이리저리 달라붙어서 녹


아내 린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한다. 만나고 싶다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렇게 도착한 그곳에는 그녀


가 서있다.


강소영이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었던 우리


강소영은 처음 만나던 날 모습 그대로 내 눈앞에 서있다. 어깨너머 흘러내린 긴 생머리, 고등학교 때와


는 많이 달라진 옷차림, 예전과는 다르게 슬픔이 가득해진 눈만 제외하고는. 나는 소영이에게 다가가


두 손을 잡는다. 이제 소영이가 선물했던 장갑은 더 이상 내 손을 감싸고 있지 않다. 대신 소영이의 하얀


두 손이 오래전 그날처럼 나를 따듯하게 감싸주고 있다.


'소영아. 우리 사랑했었잖아. 그걸 숨기고 지우려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아무리 마음 아프고 슬프더라


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잖아.'


사실 나,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는데. 단지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으로 끝나는 첫사랑이 아니라. 소영이 네가


머리 하얗게 되고 주름으로 뒤덮인 할머니가 되더라도 껴안아 주고 싶었는데


'성민아...'


'미안해. 너한테 너무 냉정하게 대한 거 같아. 내 마음이 아프다는 핑계로 차갑게 대한 것 같아. 사실,


난 이기적이었어. 너와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라이벌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에. 내 개인적인 야망과


욕심 때문에 너를 외롭게 했어. 그러면서도 나는 널 원망하고 미워하기만 했어.'


소영이가 슬픈 눈을 들어서 나를 쳐다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 내가 사랑했던


눈. 나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응시한다. 그렇게 소영이와 솔직하게 마주한다. 더 이상 우리를 가로막


있던 오해는 없다. 거짓으로 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구속도 없다.


'어떡하지 소영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을 사랑하겠다던 약속. 지키지 못할 거 같아. 나 너 말고 사랑


하는 사람 생겼다? 그런데도 널 잊지 못 해서 매일 괴로워야 했어.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랑을 시작하려


고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하려고 해.'


소영이의 맑은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소영이의 손이 가볍게 떨린다. 나는 그 손을 꼭 잡아


준다.


'성민아 진심이야? 나 말고 다른 사랑 시작할 수 있어? 정말 그런 거야?'


'우리 앞으로 상처받고 아프더라도 흔들리지는 말자 다른 사랑에게는. 잊지 못하더라도 외면하지 말자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을.'


'아프지 마 성민아. 내 잘못이잖아. 너는 아파하지 마 성민아.'


'고마웠어. 정말로 사랑했어 소영아. 나 이제 그만 돌아갈게.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말아줘. 이번엔 진


짜야. 전에 널 만났을 때는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어. 그런데 지금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 너를


잊지는 못하겠다고, 하지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꼭 잡았던 두 손을 살며시 놓고 뒤돌아서서 어디론가 뛰어간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간다.


소영이를 남겨둔 채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눈물이 흐른다. 나는 그렇게 소영이와의 기


억을 마감한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야 하기에.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어느 시점에서부터가 소영이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시연과 가까워지기 위해 달려


가고 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손시연의 고등학교 앞에 도착해있다. 손시연의 교실을


찾아간다. 많은 여학생들이 자리에 앉아서 자습을 하고 있다. 손시연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니,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시연이요? 오늘 아프다고 자습 안 하고 먼저 갔는데요?'


손시연이 어디 있는지 묻는 나에게 한 여학생이 그렇게 대답해준다. 결국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다. 학교로 찾아왔지만 선물을 건네주지는 못 했다. 내 잘못이다. 모두. 나는 이제 너를 어떻게 만


나야 하는 걸까. 다시 한번 학교를 찾아와야 할까. 다시 시작하자고 연락을 해야 할까. 너의 집 앞으로


찾아가야 할까.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흔들리지 않는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나는 꽃다발과 선물을 들고 터벅터벅 하숙집으로 걸어왔다. 꽤 먼 거리였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안


았다. 힘들지 않았다. 단지 손시연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 만이 나를 감싸고 있다.


숨을 몰아쉬면서, 초췌해진 몸을 이끌고 나는 하숙집 대문을 연다.


그곳에 누군가 있다. 손시연이다. 처음 만나던 그날처럼 교복을 입고 있다. 꽤나 오래 기다린 듯한


모습이지만 예전 그날처럼 화를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주 조금 두려워하고 있다. 나와 다시 마주하


는 그 순간을 손시연은 어색한 듯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그런 손시


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서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손시연의 얼굴, 손시연의 눈빛이 내 눈앞에 다가온다.


'나쁜 아저씨 말이 맞았네요? 청송대에서 소원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


손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활짝 웃고 있다. 다행이야. 바보 같은 난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너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나의 소원도 이루어져서.


나는 손시연을 끌어안는다. 조금 더 일찍 끌어안아 줬어야 했는데. 소영이 때문에 흔들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작고 연약하기만 한 너에게 난 내 모든 걸 의지했었는데. 사랑했었는데.


'아저씨,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초췌해요? 좀 멋진 모습이면 안 돼요? 그래도 사랑해요 아저씨. 조인성보


다도 훨씬 사랑해요. 이런 모습이라도 괜찮아요.'


나는 손시연과 마주할 때 언제나 솔직하지 못 했다. 속 마음을 숨기고 냉정하고 까칠하게만 대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숨기지 않고 싶다. 내 속마음을 언제나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외쳤으면서도 퉁명스


러운 청해야 했던 나의 마음을...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시연아.'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간다. 우리 둘의


입술에는 서로의 눈물이 묻어 있지만 상관없다. 손시연의 하늘에서도, 나의 하늘에서도 눈이 내리고


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너를 사랑할게.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연대생이었고 그녀는 여고생이었다.






ㅡ fin



출처:고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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