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낭만주의의 형이상학적 전율 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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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리트 지문인데
내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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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은 낭만적인 슬픔을 소박하고 서정적인 시구로 가장 아름답게 노래한 시인이다. 그러나 김소월의 슬픔은 「불놀이」의 슬픔과 그 역학을 달리한다. 주요한의 「불놀이」에는 슬픔에 섞여 생(生)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갈망이 강력하게 표현되었다가 곧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주요한의 슬픔이 실현되지 아니한 가능성의 슬픔이라면, 소월의 슬픔은 차단되어 버린 가능성을 깨닫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그는 쓰고 있다.
살았대나 죽었대나 같은 말을 가지고 사람은 살아서 늙어서야 죽나니, 그러하면
그 역시 그럴 듯도 한 일을, 하필코 내 몸이라 그 무엇이 어째서
오늘도 산마루에 올라서서 우느냐.
김소월에게서 우리는 생에 대한 깊은 허무주의를 발견한다. 이 허무주의는 소월이 보다 큰 시적 발전을 이루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허무주의는 그로 하여금 보다 넓은 데로 향하는 생의 에너지를 상실하게 하고, 그의 시로 하여금 한낱 자기 탐닉의 도구로 떨어지게 한다. 소월의 슬픔은 말하자면 자족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의 해결이 된다. 슬픔의 표현은 그대로 슬픔으로부터의 해방이 되는 것이다.
시에서의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은 대개 이러한 일면을 갖는다. 문제는 그것의 정도와 근본적인 지향에 있다. 그것은 자기 연민의 감미로움과 체념의 평화로써 우리를 위로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멜로드라마의 대단원처럼 분명한 긍정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소월의 경우보다 더 깊이 생의 어둠 속으로 내려간 인간들을 안다. 횔덜린이나 릴케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깊은 절망이 된 다음 난폭하게 다시 세상으로 튕겨져 나온다. 그리하여 절망은 절망을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한 맹렬한 반항이 된다. 이들이 밝음을 긍정했다면, 어둠을 거부하는 또는 어둠을 들추어내는 행위 그 이상의 것으로서 긍정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월의 부정적 감정주의의 잘못은 그것이 부정적이라는 사실보다 밖으로 향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안으로 꼬여든 감정주의의 결과는 시적인 몽롱함이다. 밖에 있는 세계나 정신적인 실체의 세계는 분명한 현상으로 파악되지 아니한다. 모든 것은 감정의 안개 속에 흐릿한 모습을 띠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주의가 밖으로 향하는 에너지를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는데, 이 밖으로 향하는 에너지란 ‘보려는’ 에너지와 표리일체를 이룬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르게 보는 것이며, 여기서 바르게 본다는 것은 가치의 질서 속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는 거죽으로 그렇게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에 대한 신념을 전제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완전히 수동적인 허무주의가 시적 인식을 몽롱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가령 랭보에게 있어서 어둠에로의 하강은 ‘보려는’ 에너지와 불가분의 것이며, 이 에너지에 있어서 이미 수동적인 허무주의는 부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월의 경우를 좀 더 일반화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낭만주의의 매우 중요한 일면을 지적할 수 있다. 서구의 낭만 시인들이 감정으로 향해 갔을 때, 그들은 감정이 주는 위안을 찾고 있었다기보다는(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리얼리티를 인식하는 새로운 수단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들에게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직관이 진실을 아는 데 보다 적절한 수단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서구 낭만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충동의 하나는 영국의 영문학자 허버트 그리슨 경의 말을 빌면, ‘형이상학적 전율’이었다. 이 전율은 감정의 침례(浸禮)를, 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관한 직관으로 변용시킨다. 한국의 낭만주의가 결하고 있는 것은 이 전율, 곧 사물의 핵심에까지 꿰뚫어보고야 말겠다는 형이상학적 충동이었다. 이 결여가 성급한 허무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면 소월의 허무주의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자전적인 사실이 거기에 관여되었음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정신적 지평에 장기(瘴氣)처럼 서려 있어 그 모든 활동을 힘없고 병든 것이게 한 일제 점령의 중압감이었을 것이다. 소월은 산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고 되풀이하여 묻는다. 그러나 이 물음은 진정한 물음이 되지 못한다. 그는 이 물음을 진정한 탐구의 충동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는 이미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과 같다는 답을, “잘 살며 못 살며 할 일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산다는 ……”(「어버이」) 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 한 번 물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의 원인인가하고.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에게는 ‘보려는’ 에너지, ‘물어보는’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는 너무나 수동적으로 허무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질문의 포기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의 첫째 원인은 누구나 알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월이 그의 절망의 배경에 있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의 시는 조금 선명해진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은 그의 절망에 정치적인 답변을 준 드문 시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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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고도